MALEDICTION / 단편소설

방패로든 검으로든

By Shield or by S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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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로든 검으로든

By Shield or by Sword

말레딕션 공식 삽화 — Decree of Valcaris

차른의 성벽은 먼 지평선의 음울한 먹구름처럼 먼지투성이 평원 위로 솟아 있었다. 불길하고 배타적인 모습이었다.

시그리스 안드라보스는 높이 치솟은 흉벽을 응시하며, 저 음침한 광경이 앞으로 닥칠 일의 전조라는 생각을 떨쳐 내려 했다. 차른은 오래전에 떠나온 곳이었다. 그 일대에서 자라며 마냥 불행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젊은 시절의 옛 자취를 굳이 서둘러 다시 찾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녀는 마음을 덮쳐 오려는 불길한 기분을 털어 내려 했다.

이 성벽은 그녀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 하지만 한때는 나를 가두는 감옥이었지.

시그리스는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수밖에 없다고 마음먹고 안장 위에서 몸을 앞으로 숙여 말을 재촉했다. 하지만 오랜 여정에 지친 짐승도 콧김을 내뿜으며 그녀의 채근에 저항했다.

“참으로 장관이지 않습니까?” 왼쪽에서 말을 몰던 전령이 한 말이었다. 말로 경은 이곳 차른에 있는 시그리스의 옛 후견인 웰스테드 부인을 찾아가 달라고 청하려고 파견된 사람이었다. 그는 명예의 의식 소속 기사로, 그에 따르는 온갖 위용을 갖춘 금빛 제복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 지위와 기사들의 냉담하다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시그리스가 보기에 그는 사려 깊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도시 말입니다.” 혹여 시그리스가 뜻을 잘못 알아들었을까 봐 그가 덧붙였다.

시그리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변하지 않는 광경이군요. 성벽은 제 기억 속 모습 그대로입니다.”

말로가 눈살을 찌푸렸다. “용서하십시오, 안드라보스 님. 망설이고 계신 듯합니다. 괜찮으십니까?”

“과거를 다시 마주하는 것은 언제나 배움이 되지요.” 시그리스가 말했다. “품위와 불굴의 의지로 견뎌야 하는 배움이요.”

말로는 악의 없이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이 요새 도시에 마지막으로 오신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안드라보스 님?”

“거의 십 년입니다.” 시그리스가 말했다.

어머니가 될 뻔한 여자를 본 지도 십 년이었다.

앞으로 몇 시간은 참으로 흥미진진할 터였다.

“성벽과 마찬가지로 도시 안의 삶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말로가 말했다.

“그렇겠지요.” 시그리스는 가까워지는 외곽 성문을 바라보며 동의했다. “아마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말레딕션 공식 삽화 — Sigrith 1

“달라졌구나. 뺨에는 혈색이 돌고, 눈빛은 단단해졌어.” 여인이 손을 내저었다. “다 컸구나. 단지 성년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시그리스. 태도부터 달라졌어. 이제 너는 한 사람의 여인 그 이상이다. 유산의 영예와 그에 따르는 무게를 짊어지고 있지.”

시그리스는 웰스테드 부인의 저택에 있는 접견실에 서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호화로운 흰 대리석 벽판에는 웰스테드 가문의 옛 기사들이 세운 위업이 하나하나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그들은 과거의 유산 보유자들이자 명예의 의식에서도 가장 칭송받은 전사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천 년도 더 전, 대몰락이라는 대재앙의 여파 속에서 셀레지아가 재건되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일렁이는 횃불은 인물들의 윤곽에 짙은 음영을 드리우며 오래전에 죽은 영웅들에게 마법과도 같은 생명을 불어넣었다. 웰스테드 부인의 피후견인으로 이 집에서 성년이 된 시그리스는 젊은 시절 이 부조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손끝으로 선 하나하나를 더듬으며 지나간 시대의 경이로운 이야기들을 모두 떠올리곤 했다.

그녀가 뜻을 이룬다면 언젠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를 시대였다.

시그리스는 눈앞의 여인을 살폈다. 웰스테드 부인은 세월의 흔적이 완연했지만,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금발은 희끗희끗해졌고 입가와 눈가의 가느다란 주름은 깊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는 지쳐 보였다. 근심에 잠긴 모습이었다. 이제는 벗어 둔 갑옷을 대신한 고운 예복과 정교한 보석의 우아한 겉치레 뒤로 무언가가 그녀를 깊이 괴롭히는 듯했다. 시그리스도 이것이 새삼스러운 발견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옛 보호자가 그저 회포나 풀자고 셀레지아의 절반을 가로질러 자신을 불렀을 리 없었다.

“집에 와서 기쁠 거라고 생각한다.” 웰스테드 부인이 말을 이었다. “모두 네가 그리웠어. 물론 네가 세운 업적은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단다. 하지만 네가 없으니 집이 조용하구나. 너무 조용해.” 그녀는 왼손을 휘저어 막연히 천장을 가리켰다. “물론 네 방은 그대로 있다. 혹시 모르니 늘 하인들에게 잘 관리하라고 이르지.”

시그리스는 여인과 시선을 맞췄다. “무슨 일입니까, 부인? 왜 저를 부르셨습니까?”

웰스테드 부인은 입술을 오므리고 시그리스를 가늠하듯 바라보았다. 입을 열었을 때, 꾸며 낸 경쾌함은 목소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정말로 달라졌구나. 그렇지? 전에는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않았을 텐데. 너한테 잘 어울리는구나.”

웰스테드 부인…….” 시그리스가 재촉했다.

“조탄이 실종됐다.” 여인은 어떻게든 말을 덜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듯 짧고 끊어지는 음절로 최대한 빨리 내뱉었다. “말레딕션 안에서.”

시그리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어린 시절 그녀를 그토록 괴롭혔던 조탄.

한때 감히 자기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던 고아에 불과한 시그리스가 안드라본을 발견해 유산이라는 선물을 받자, 질투와 악의로 가득한 사내로 자란 조탄.

가문의 유산은 다른 이에게 정해져 있었는데도 자기 것으로 차지하려고 싸웠던 조탄.

그는 아마 시그리스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집요했을 터였다. 전쟁을 부추기는 그의 기질은 웰스테드 가문에 잔혹하지만 영광스러운 명성을 안겨 주었다.

그런 그가 실종되었다.

말레딕션 안에서.

자업자득일 뿐이었다.

“유감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웰스테드 부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러지 마라, 얘야. 내가 누군지 잊었느냐. 셀레지아의 그 누구보다 너를 잘 아는 사람이다. 넌 유감스럽지 않아. 아마 그 어리석은 아이는 무슨 일을 당하든 제 탓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녀는 시그리스의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돌아섰다. “그리고 아마 네 말이 옳을 거다. 나도 그 애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으로 자랐는지 알아. 의무보다 야망을 앞세우다 망가졌지. 그래도 그 아이는 내 아들이다, 시그리스. 네가 이름으로는 아닐지언정 마음으로는 여전히 내 딸이듯이.”

“제가 그를 뒤쫓길 바라시는군요.” 시그리스가 말했다.

웰스테드 부인의 입꼬리에 힘없는 미소가 걸렸다. “나는 네가 창을 뒤쫓길 바란다.” 그녀는 자기 말이 지닌 의미와 그 요청에 깃든 계산적인 냉혹함을 저울질하듯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말을 이었다. “조탄이 아직 살아 있다면 그 축복을 기꺼이 맞이하마. 하지만 유산은…….” 말끝을 흐렸지만 그 뜻은 분명했다. 조탄이 지녔던 유산, 카디사르의 창은 고대에서 살아남은 희귀한 물건으로, 영생자들의 전쟁 당시 오스터가 직접 벼렸다고 전해졌다. 그것은 교단 내 권력의 상징으로 스무 세대 동안 웰스테드 가문에 맡겨져 있었다. 웰스테드 가문으로서는 결코 잃을 수 없는 지위였다.

시그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옛 보호자가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를 알았다. 이보다 더 중대한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만약 창이 다른 이들의 손에 넘어간다면…….

“내가 비정하다고 생각하겠지.” 웰스테드 부인이 말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얘야. 나라고 조탄이 저 문으로 멀쩡히 걸어 들어오는 것보다 바라는 일이 또 있겠느냐.” 그녀는 손목을 까딱해 접견실 저편 끝의 문을 가리켰다. “하지만 창을 잃으면 문 따위는 아예 없어질 거다. 좋든 싫든, 그 창은 우리 가문의 미래가 세워진 토대가 되었으니까.”

시그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조언을 구해야겠습니다.”

웰스테드 부인은 그 말을 듣고 움찔하는 듯했다. “조언? 무슨 조언이 더 필요하다는 거냐? 내 곤경을 보았잖느냐. 우리 가문의 운명이 이렇게 기우는 걸 두고 볼 셈이냐?”

우리 가문.

그 말은 시그리스의 가슴을 깊이 찔렀다. 과연 그 말이 진실이었던 적이 있나? 자신이 진정 웰스테드 부인 가문의 일원이었던 적이 있었나? 아니면 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녀를 부르는 데 편리해서 한 말에 불과한가? 이제 그녀에게 조탄과 창을 찾을 수단이 생겼으니까. 이제 그녀가 다시 쓸모 있어졌으니까.

시그리스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어쩌면 자신이 매정하게 굴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웰스테드 부인의 말이 옳았다. 사라진 유산을 되찾는 것은 웰스테드 가문의 위상과 의식 자체의 명망에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자신이 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

“저는 가족이나 의식의 유대보다 훨씬 위대한 대의를 섬깁니다.” 그녀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곤경입니다, 부인. 개인적인 감정에 휩쓸려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웰스테드 부인은 한 걸음 물러나며 시그리스의 등에 멘 화려한 방패 테두리로 시선을 옮겼다. “안드라본을 말하는구나.”

시그리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제 의무이자 제 삶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앞으로의 일을 결정할 때 그 뜻도 들어야 합니다.”

웰스테드 부인은 손을 뻗어 시그리스의 손을 꼭 잡았다. “그렇게 하렴. 넌 언제나 명예로운 아이였지. 그래서 조탄이 너를 그토록 미워했던 거다. 너는 늘 그 아이를 보잘것없게 만들었으니까.” 그녀가 힘없이 미소 지었다. “이 가문의 운명은 네 손에 달렸다, 시그리스. 네 손과 네가 짊어진 그 방패 속 영혼의 손에.”

말레딕션 공식 삽화 — Andravon scaled

“오직 어둠의 자궁에서만 빛의 꿈이 태어날 수 있다.”

시그리스는 저택 본관 뒤편에 있는 작지만 정교한 건축물, 웰스테드 예배당의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곳은 트리움비레이트의 장엄함에 바쳐진 장소였다. 거대한 세 석상이 예복을 두른 채 위압적으로 그녀를 굽어보았다. 그들 앞에서 땅에 엎드린 그녀를 심판하는 듯했다.

그녀 앞의 대리석 계단에는 안드라본이 놓여 있었다. 차가운 완벽함을 품은 얼굴은 창백한 돌로 조각되어 있었고, 몸체 가장자리에는 청동과 금이 둘러져 있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는 동안 입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두 눈에서는 핏빛 눈물이 줄지어 흘러내려 아래 계단에 고였다.

“오직 황야에 자신을 내맡겨야만 참된 길을 알아볼 수 있다.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일을 해야 합니까?” 시그리스가 물었다. “조탄과 카디사르의 창을 찾아야 합니까?”

안드라본의 목소리는 낮게 우르릉대는 신음 같았다. “네 앞에는 선택이 있다. 갈림길이 놓여 있다. 한 길은 네가 한때 가까이 여긴 자들을 파멸로 이끌지만, 미래의 평화를 위협하는 대결을 피한다. 다른 길은 말레딕션과 잃어버린 모든 것으로 이어지지만, 불확실한 미래의 혼돈을 받아들인다.”

시그리스는 침을 삼켰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확실한 미래가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것은 늘 변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당신이 말한 황야가 아닙니까?”

안드라본이 낮게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그리스는 그것이 웃음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너는 이미 결정을 내렸고, 네 길은 분명하다.”

시그리스가 숨을 내쉬었다.

좋아.

그렇다면 황야로 간다.

말레딕션 공식 삽화 — Noxious Giants

이곳은 하늘조차 잘못되어 있었다.

시그리스는 떠올리고 싶은 횟수보다 훨씬 많이 말레딕션의 오염된 길을 걸었다. 하지만 죽은 공기와 응고된 듯 붉은 하늘, 몸서리치듯 일그러진 땅을 마주할 때마다 새로운 공포의 여명이 밝아 오는 것 같았다. 거대한 갈드룬의 장벽 안에 갇힌 이곳은 곧 망각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구원의 열쇠이기도 했다. 거의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악몽의 땅 깊은 곳 어딘가에 영생자를 되살릴 열쇠가 숨겨져 있었다. 영생자들은 한때 이미리스를 가두고 그 분노를 억누르려고 장벽을 세운 불멸자들이었다. 이곳에는 지나간 시대의 유물도 발굴되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불러올 성스러운 대의에 쓰일 물건들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 한번 부서진 하늘 아래를 힘겹게 걸었다. 그 틈으로 먼 옛 시대의 별자리가 아직도 언뜻 보였고, 멍든 구름은 세상 표면에 묻은 핏자국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그녀의 뒤에는 대의에 충성을 맹세한 스무 명의 용맹한 영혼이 따랐다. 부름에 응해 모인 교단의 신자들이었다. 이 남녀는 말레딕션이 품은 양면성, 매혹적인 유혹과 치명적인 포옹을 너무나 잘 알았다. 하지만 그들 또한 의무와 명예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말로 경도 구조 혹은 회수 임무에 동행하겠다고 자원했다. 하지만 시그리스는 그 결정에 그의 기사도가 얼마나 작용했고, 웰스테드 부인의 대비책이 얼마나 작용했는지 궁금했다. 이 미지의 땅을 탐사하던 중 시그리스마저 쓰러진다면, 적어도 말로가 곁에 있다가 조탄의 유산을 차지해 차른으로 가져갈 수 있을 터였다. 유산과 안드라본을.

아니면 자신이 그저 냉소적으로 변한 것일지도 몰랐다.

인정하고 싶은 것보다 자신이 웰스테드 부인을 더 많이 닮았는지도 몰랐다.

그들 앞에는 두드러진 산마루가 연이어 솟아 황량한 평원을 뒤틀고 갈라놓았다. 마치 지하의 대지가 힘껏 어깨를 들썩여 겉가죽을 벗으려다 포기해, 땅이 터지고 갈라진 채 남은 듯했다.

“이게 뭡니까?” 바로 왼쪽에 있던 말로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거칠었다. 시그리스가 생각하기에 아마 동쪽일 방향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 때문에 말소리는 거의 완전히 묻혔다. 하지만 말레딕션의 이토록 깊은 곳에서는 방향을 확신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말로가 혼란스러워하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가 선 자리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창백하고 바스러질 듯한 구조물 여러 개가 거친 땅을 뚫고 솟아 있었다. 덩치는 작지 않은 말로보다도 거의 두 배나 컸다. 위대한 배신자들을 기리려고 세운 기묘하고 추상적인 아치나 거석 구조물 같은 성스러운 건축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그리스는 그것이 훨씬 더 기이한 무언가라는 걸 잘 알았다.

“뼈입니다.” 그녀는 기사 곁에 서며 말했다.

라고요?” 말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팔다리 하나가 사람의 세 배 크기로 솟을 만큼 거대한 뼈라니, 대체 어떤 생물이었단 말입니까?”

시그리스는 미소 지었다. 말레딕션이 더 깊은 진실과 경이를 보여 주기 전에는 그녀도 저토록 순진했고 믿지 못했다. “거인의 잔해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가시를 만든 자들 중 하나지요.” 그녀는 솟은 뼈 밑동 주위의 녹슨 빛깔 땅을 가리켰다. “더 자세히 보세요.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반쯤 썩은 이 상태에서도 살아 있어요. 이렇게 땅속에 묻혀 있는데도.”

말로는 경이로움을 숨기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 그게 그저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비유 말입니다. 전설 속 생물이라고요.”

시그리스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제 진실을 알게 되었군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다른 자들이 있습니다. 느껴집니다.”

“다른 거인들입니까?” 말로가 걱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그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창을 찾는 다른 자들입니다. 우리만 있는 게 아니에요.”

말로는 허리춤의 검을 고쳐 찼다. “그렇다면 질문으로 더는 시간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부인. 가시지요. 저들보다 먼저 아우님을 찾아 명예의 의식과 웰스테드 가문을 위해 창을 되찾겠습니다.”

시그리스는 그가 다른 이들과 발맞춰 걷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도 그토록 확신하고, 목적을 그토록 분명히 알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눴을 때 전령이 뭐라고 했더라?

확실한 것은 없어. 이 삶에는.

시그리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보다 참된 말은 없었다.

말레딕션 공식 삽화 — Herald of Salvation

“그것이 너를 잘못 이끈 적이 있어?”

그녀의 곁을 걷던 기묘한 황금빛 눈의 형상이 물었다. 눈부신 은빛 갑옷을 두른 형상의 등 뒤로는 거대한 금속 날개가 활짝 펼쳐져 있었고, 그 깃털은 기분 좋은 산들바람 속에서 반짝였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 시그리스가 말했다. 두 사람은 거대한 상크토룸 건물군의 내벽에 자리 잡은 사원 정원의 좁은 길을 걷고 있었다. 주위에는 무수히 많은 성인들의 침울한 얼굴이 돌 받침대 위에서 그들을 굽어보았다. 번들거리는 흰 돌에 새겨진 얼굴들이었다. 나무는 바람을 따라 한데 바스락거리며 서로 속삭이는 듯했고, 길 위로 공물처럼 잎을 흩뿌렸다. 새들은 지저귀며 키 낮은 회양목 울타리를 들락거렸다. 다른 곳에서는 사제 셋이 깊고 열띤 신학 논쟁에 빠진 채 같은 정원을 느릿느릿 돌고 있었다.

구원의 전령은 고개를 갸웃하며 환하게 웃었다. 한때 시그리스의 가장 소중한 친구 칼레아나였던 여인은 기적적인 변화를 거쳐 이제 그녀의 곁을 걷는 성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왜 이번에는 너를 잘못 이끌까 두려워하지? 모든 증거가 그 반대를 가리키는데.”

두 사람은 안드라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존재가 시그리스에게 지우는 점점 커지는 요구와 유물을 짊어져야 하는 막중한 책임에 관해서였다.

최근 들어 시그리스는 의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을 얼마나 많이 유산에 내주었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어느 길을 걸을지 스스로 선택하는 일이 얼마나 적은지도. 그 존재가 지혜롭다는 것은 명백했다. 수천 년을 존재하며 그 장구한 세월에 걸맞은 지식과 경험을 쌓은 존재였으니. 하지만 그 목적이 언제나 온전히 자신의 뜻과 일치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교단의 뜻과도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시그리스는 안드라본을 섬긴 세월이 결실로 가득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들이 말레딕션으로 떠난 원정에서 얻은 결과는 교단에도 이롭지 않았던가?

그녀는 친구를 돌아보다 호박빛으로 빛나는 그 눈에 잠시 불안해졌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알겠어? 어떻게 확신하지?”

전령이 웃었다. “확신과 믿음이 언제부터 사이좋게 한 침상을 썼지?”

시그리스도 씩 웃었다. “자기 중요성을 확신하는 사제라면 많이 만나 봤지.”

전령이 웃었다. “그건 그렇네. 하지만 내 말을 비틀고 있어, 시그리스. 내 말은 그저 확실한 것은 없다는 뜻이야. 이 삶에는. 미래를 알아낼 수도 없고, 걷지 않은 길이 더 나은 결과로 끝났을지 확실히 알 수도 없어. 그저 서툴게 헤쳐 나가며 희망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야.” 그녀가 미소 지었다. “안드라본은 이 딜레마의 해답이 아니야. 네 앞에 놓인 선택지를 헤쳐 가도록 돕는 도구일 뿐이지. 무지에 맞서는 위대한 싸움에서 네게 주어진 이점이야.”

시그리스는 벚나무 가지 아래에서 멈춰 섰다. 환한 꽃향기가 가슴을 벅차게 채워 더없이 평온했다. 지금 이 순간, 이토록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에서 친구와 함께 있다니 얼마나 큰 행운인가.

어쩌면 전령의 말이 옳았다. 분명 지금 이 순간은 그녀가 지금껏 내린 모든 선택의 총합이었다. 안드라본의 안내를 받아 바로 여기, 바로 이 순간까지 그녀를 이끈 길이었다. 지금껏 치른 피비린내 나는 전투와 교단의 이름으로 쓰러뜨린 모든 적, 온갖 의심은 어쩌면 이런 순간을 위해 존재했을지도 몰랐다.

아마 시간이 알려 줄 터였다.

말레딕션 공식 삽화 — The Husk

“저 아래입니다. 하지만 부인, 경고부터 드려야겠습니다. 차마 보기 힘든 광경입니다.”

시그리스는 안드라본 너머로 말로를 바라보았다. “경, 장담하건대 나는 이 슬픔 가득한 장소의 심연까지 헤아렸고, 필멸자 대부분이 열병에 들려 꾸는 상상조차 뛰어넘는 공포와 마주했습니다. 죽음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 따위는 두렵지 않습니다.”

말로는 다음 말을 삼키려는 듯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하지만…… 조탄은…… 가족이었…… 아니, 가족이지 않습니까?”

시그리스는 대답하는 대신 그저 그를 옆으로 밀어내고 골짜기 밑바닥이 내려다보이는 산마루로 다가갔다.

이곳의 땅에는 돌과 먼지가 널려 있었고, 마른 흙이 붉은 기운을 더해 말라붙은 피처럼 음산한 빛깔을 띠었다. 처음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바위라고 생각했지만, 가까이 살펴보니 필멸자가 만든 건축물의 잔해였다. 너무나 흩어지고 침식되어 고대 화산 폭발의 산물로 쉽게 착각할 만했다.

군데군데 더 작고 표백된 뼈가 흙을 뚫고 삐죽 나와 있었다. 영겁의 세월에 표면이 매끈하게 닳은 뼈였다.

한때 이곳에는 사람들이 살았다. 세상이 병들기 전에. 대몰락이 일어나기 전에.

시그리스는 이와 비슷한 광경을 전에도 보았지만, 이곳에서 발견하는 진실은 언제나 그녀를 압도했다. 하지만 지금은 더욱 다급한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골짜기의 움푹 파인 틈을 내려다보았다.

말로의 말이 옳았다.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조탄 일행의 시신은 중심점을 둘러싸고 느슨한 원 모양으로 흩어져 있었다. 마치 어떤 폭발력에 뒤로 튕겨 나간 듯했다. 하지만 적어도 산마루 위에서 알아볼 수 있는 한, 그들을 죽인 것은 마법적인 힘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잔인하고 난폭한 공격을 연이어 당해 난도질된 모습이었다.

더 끔찍한 점은 쓰러진 모양새와 다른 무리 전투원의 시신이 전혀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 시그리스가 보기에는 조탄의 부하들이 서로에게 이런 짓을 한 듯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공격했다.

무언가가 그들을 몰아붙여 동료의 피를 흘리게 했다.

피범벅이 된 시신들이 이루는 이 소름 끼치는 광경 한복판에는 음산한 기념비가 우뚝 솟아 있었다. 잿빛을 띤 기둥은 오염되고 석화한 살점으로 이루어졌고, 협곡의 기묘한 박명 속에서 창백한 빛을 맥박치듯 뿜어냈다.

유해였다.

조탄에게서 남은 것이었다.

말레딕션의 뒤틀린 경계 안에서 죽은 유물 보유자는 모두 이렇게 되었다. 유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육신을 빚고 다시 만들어 물건을 보호하는 살덩이 껍질로 바꾸었다. 유산 보유자가 같은 운명을 맞는 것은 느리고 끔찍한 과정이었고, 조탄의 무모함과 오만함을 증명했다.

이곳이 창의 안식처였다. 어린 시절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남매가 될 뻔한 자가 맞이한 불명예스러운 최후였다.

시그리스는 숨이 턱 막혔다. 그의 죽음을 이토록 뼈저리게 느낄 줄은 몰랐다. 조탄이 그녀를 미워한 만큼이나 그녀도 조탄을 미워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녀를 과거에 묶어 두던 또 하나의 끈이 끊어졌다. 안드라보스라는 이름을 택하기 전의 자신과 또 한 걸음 멀어진 것이다.

“한때 묶여 있던 끈이 그렇게 풀려나는구나.” 안드라본의 목소리가 우르릉거렸다.

“하지만 기억은 남습니다.” 시그리스는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기억 자체도 우리를 묶는 끈이 아닙니까?”

안드라본의 웃음은 바늘로 찌르는 듯했고, 그녀는 자신의 부족함에 신경이 곤두섰다. 때로 그녀는 너무도 인간적이었다.

시그리스는 움직임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 산마루에 형체 하나가 나타났다. 말레딕션의 기괴하게 소용돌이치는 빛을 등진 실루엣에 불과했지만, 시그리스는 자신과 같은 탐색자임을 알았다. 이제 아래에서 기다리는 유산의 유혹에 이끌려 이 비참한 죽음의 장소에 온 자였다.

그녀가 지켜보는 사이 다른 자들도 협곡 맞은편을 넘어 쏟아져 나와, 흙을 긁어 대며 유해와 그 곁의 시신들을 향해 내려갔다.

“네게 우위가 있다.” 안드라본이 말했다. “저들은 오늘 이미 전투를 치렀다. 상처 입은 자가 얼마나 많은지 보아라. 네가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다. 저들이 흙바닥을 기며 전리품을 차지하려 할 때 하나씩 쓰러뜨릴 수 있다. 지금 공격하면 사소한 희생만 치르고 빠르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다.” 방패 속 영혼이 말을 멈췄다. “아니면…….”

“계속 말하십시오.” 시그리스가 재촉했다. 이것이 유산의 방식이었다. 명령은 결코 내리지 않고, 그저 선택으로 이끌었다.

“아니면 외교의 길을 시도할 수도 있다. 피는 덜 흐르겠지만, 몰레크의 추종자들이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 가진 이점을 잃을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상대 탐색자는 결사회 소속이며, 그의 피 자체에 리아스트룸의 마법이 엮여 있었다. 전투는 분명 위험할 터였다. 그리고 시그리스가 보기에 사소한 희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생명은 신성했다…… 유혈을 피할 방법이 있다면 시도하는 것이 그녀의 의무였다.

“저들의 탐색자와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녀는 다른 이들도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부인.” 말로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허락할 수 없습니다. 위험이…….”

시그리스는 방패를 등에서 내려 팔을 가죽끈 사이로 끼웠다. 몸을 돌려 자신과 기사 사이에 안드라본을 놓았다.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방패로 그를 옆으로 밀어냈다. “허락하고 말고는 경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비키든지 나와 함께하든지. 선택은 경의 몫입니다.”

말로는 항의하려던 듯했지만 그녀의 눈빛을 보고 입술 끝에서 말이 사라졌다. “뜻대로 하십시오, 부인.”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산마루 위에서 기다리라는 손짓을 보냈다. 자신이 신호하는 즉시, 혹은 결사회 쪽에서 먼저 적의를 보이면 그 전에라도 움직일 터였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말로는 그녀와 함께 협곡을 내려가 기다리는 적에게 향하며 말했다.

“목이 어깨에서 잘려 나가거나, 불타는 리아스트룸에 정신을 빼앗기며 끝난다면 훨씬 더 마음에 들지 않을 겁니다.” 시그리스는 의도한 것보다 조금 거칠게 말했다.

말로는 칼집에 든 검의 자루에 손을 얹었다. “아직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가 나직이 말했다.

시그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요. 어디 한번 봅시다.”

“접근을 멈춰라, 시그리스 안드라보스. 이곳은 네가 올 곳이 아니다.”

시그리스는 일부러 협곡의 분지 안으로 몇 걸음을 더 내디딘 뒤에야 남자의 말을 들었다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고는 높이 솟은 유해의 기둥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한때 조탄의 것이었다가 이제는 기괴한 기념비의 흉물스러운 모조품으로 뒤틀린 이상하고 일그러진 살점에서 풍기는 악취에 절로 코를 찌푸렸다. 주위에는 조탄을 따랐던 교단 사람들의 시체가 끔찍한 죽음의 피웅덩이 속에 널브러져 있었다.

결사회 일행 몇몇이 마스터의 명령을 노골적으로 무시한 그녀에게 격분해 칼집에서 무기를 빼 드는 소리를, 시그리스는 보지 않고도 느꼈다.

말레딕션 공식 삽화 — Virtahn Battlecaster 1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저한테 불리한 상황이군요, 경.” 그녀는 결사회의 탐색자를 훑어보며 말했다.

그는 시그리스가 짐작하기에 이십 대 후반으로, 헝클어진 검은 머리와 창백한 피부를 지녔다. 한때는 잘 다듬었으나 최근 들어 마구 자라게 내버려 둔 듯한 수염을 길렀다.

남자의 왼팔에는 화려한 은빛 완갑이 둘려 있었다. 시그리스는 직감으로, 혹은 안드라본과 연결된 잠재적인 감각으로 이것이 그 자신의 힘의 원천임을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를 탐색자로 구별 짓는 유산이었다.

그의 왼쪽 가슴에는 끔찍한 상처가 나 있었다. 어떤 생물이나 야수의 발톱이 예복을 찢고 안쪽의 창백한 살점을 할퀸 자국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숨을 쌕쌕 내쉬며 얼굴을 찡그렸다.

남자는 자기 조직을 향한 그녀의 경멸에도 흔들리지 않고 밝은 눈으로 시그리스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야기에서 듣던 것보다 키가 작군.” 그가 말했다. “하지만 악명은 이미 익히 들었소.”

그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당신의 악명은 들은 적이 없군요.”

남자는 그녀의 재미를 공유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스피어 비르탄의 세라트린 에트락시스요.” 그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부인은 헛걸음한 것이오. 웨이포인트 협정 제5원추 제17부칙에 따라 이 전장은 스피어 결사회를 대신해 내가 차지하겠소.”

시그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협정의 법이 이곳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당신도 잘 알 텐데요, 에트락시스 마스터.” 그녀는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뒤에 있던 말로는 폭력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며 검 자루에 손을 얹었다. “말레딕션 안에서 통하는 법은 이미리스 자신의 법뿐입니다.”

세라트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더라도 이 유해는 이미 주인이 정해졌소. 친구들에게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시오. 싸워 봐야 우리 중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을 테니.” 그는 무시하듯 돌아서서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이토록 오만하다니.

시그리스는 팔에 걸린 안드라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을 이용해, 등이 훤히 드러난 오만한 바보를 쓰러뜨리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무기는 여전히 칼집 속에 있었다.

“협상을 청합니다.” 그녀가 말했다.

세라트린은 짧고 씁쓸한 웃음을 터뜨렸다. “협상?” 그가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일에 관해 전능하신 부서진 왕좌의 교단을 대표하기라도 한다는 거요?”

“저 자신을 대표합니다.” 시그리스가 말했다. “그리고 안드라본도.”

세라트린의 눈이 그녀의 팔에 걸린 화려한 방패로 향했다. 그 눈빛에서 굶주림과 호기심의 불꽃을 볼 수 있었다. 방패를 언급하자 관심이 동한 것이다. “그 전리품을 포기하게 할 만한 무엇을 내놓을 수 있다는 거요? 나는 유산을 가지러 왔고, 반드시 손에 넣을 것이오.”

이제 모두의 시선이 시그리스에게 쏠렸다. 그녀는 얼굴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부상당한 결사회 전사들의 지치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살폈다. 누구도 이 싸움을 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곳에 오기 전 그들을 습격한 무언가가 이미 예전의 힘과 의욕을 모조리 앗아갔다. 세라트린만은 달랐다. “우리 일행에게는 새 보급품이 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상처를 보살피고, 할 수 있는 한 여러분 모두를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다음 말레딕션 밖까지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결사회 전사들 사이로 동요하는 중얼거림이 물결처럼 번졌다. 세라트린과 똑같은 짙푸른 예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앞으로 나와 세라트린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마스터. 평화롭게 건넨 이 제안을 고려해야 합니다. 부인의 말에는 지혜가 있고, 우리 중 다수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말레딕션 공식 삽화 — Bellame scaled

세라트린은 거칠게 몸을 젖혀 다른 남자의 손을 쳐 냈다.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벨라메.” 그는 추종자들을 돌아보았다. “나 말고는 그 누구도 결정할 일이 아니다.”

벨라메라는 남자는 질책을 받은 채 한 걸음 물러났지만, 자기 탐색자에게 강하게 반발하는 것이 분명했다. 결사회 사람들의 동요도 멎었다. 탐색자가 말을 마친 것이다. 그는 시그리스가 아직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듯 다시 그녀를 보았다.

“그토록 강대한 유산을 내주는 대가로 고작 이것만 내놓겠다는 거요? 위대한 안드라보스 님이 그걸 차지하려고 말레딕션 깊은 곳까지 왔을 정도의 유산인데?” 그가 말했다. “상투적인 말과 약초 따위를?”

시그리스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내쉬었다. 이 남자는 그녀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었다. “카디사르의 창은 부서진 왕좌의 교단 소유입니다. 보유자 조탄은 제 가족이었습니다. 창을 제 가문과 동족에게 돌려주는 것이 제 의무이며, 저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과연 그 창이 맞았군! 그토록 되찾으려고 혈안이 된 것도 놀랄 일은 아니지. 부인이 지닌 방패만큼이나 악명 높은 물건이니까, 안드라보스 님. 좋소.” 세라트린이 말했다. “그렇다면 반대 제안을 하나 하지.” 그는 교활하게 시그리스를 바라보았다. “안드라본. 내게 안드라본을 넘기시오. 그러면 방해하지 않고 창을 가져가게 해 주겠소.”

시그리스는 눈앞의 남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 길게 늘어졌다.

“부인…….” 말로가 한 걸음 다가가며 말을 꺼냈지만 시그리스가 손을 저어 입을 다물게 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 텐데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팔에 찬 완갑과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저 역시 안드라본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착 상태로군.” 세라트린이 말했다. “부인은 교단을 위해 창을 차지하려 하고, 나는 연구를 위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이제 우리를 모두 죽이려고 들 셈이오?” 그는 동료 결사회 전사 모두를 가리키려는 듯 팔을 크게 휘둘렀다.

시그리스는 곤두서는 마음을 느꼈다. 그래도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은 평화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일을 해결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는 무기를 들지 않으리라.

“잠시 양쪽 모두 물러나 머리를 식히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의 부상자는 휴식이 필요하고, 우리 일행은 쓰러진 교단 사람들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 세라트린을 가로막으려고 서두른 탓에, 시그리스는 조탄의 사람들이 다른 전투원의 흔적도 없이 유해 주변에 쓰러진 이유를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세라트린을 바라보았다. 그가 벌인 짓일까? 그럴 리 없었다. 유산의 정체를 몰랐다는 주장은 충분히 진실해 보였다. 게다가 가슴의 상처로 보아 그의 전투단은 명예의 의식 소속으로 잘 훈련된 기사들이 아니라 야생의 짐승 같은 무언가와 싸운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벨라메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군.” 세라트린이 말했다. “어쩌면 부인의 말도 일리가 있을지 모르지.” 그가 한숨을 쉬었다. “부상자를 돌보겠소. 그런 다음 다시 이야기합시다.”

시그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잠시나마 유예를 얻은 셈이었다. 안드라본의 조언을 다시 구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몸을 돌려 말로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세라트린의 눈에 번뜩이는 빛이 보였다. 야망과 간계를 동시에 드러내는 눈빛이었다.

“안 돼!” 그녀가 고함쳤지만 너무 늦었다. 세라트린은 유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시그리스는 경악하며 안드라본을 앞으로 돌렸다. 결사회의 탐색자는 유해의 잿빛 껍질 속으로 오른팔을 찔러 넣고, 축축하고 역겨운 살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창을 살점의 손아귀에서 잡아 뜯어 냈다.

팔꿈치까지 피칠갑을 한 그는 몸을 돌리며 창을 비틀어 움켜쥐고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시그리스의 가슴을 정확히 노려 아래로 휘둘러 찔렀다.

뒤에서 말로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시그리스는 본능만으로 움직여 안드라본을 들어 올리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창끝은 끔찍한 마찰음을 내며 방패에 부딪혔고, 옅푸른빛을 띤 날카롭고 갈래진 마법을 폭포처럼 쏟아 냈다. 마법의 손가락들은 시그리스에게 닿으려고 붙잡을 곳을 찾듯 안드라본의 얼굴 위를 미끄러지며 방패 테두리를 파고들려 했다.

[안드라보스의 방패]

시그리스는 엄청난 힘을 쏟아 다시 일어서며 방패를 공성퇴처럼 이용해 세라트린을 밀쳐 냈다.

그녀의 주위에서 결사회 일행은 방어 대형으로 물러나 있었다. 희미하게 풍기는 비 냄새를 보니 리아스트룸을 동력으로 삼은 마법의 폭풍을 준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뒤에서 활시위가 떨리는 소리와 천둥 같은 발소리가 들렸다. 아군이 적을 맞으러 협곡 아래로 돌격하고 있었다. 언제나 대담한 말로는 이미 결사회 전사 둘과 맞붙었다. 그들의 칼날은 결사회 마법에 공통적으로 깃든 기묘한 푸른빛을 내며 지직거렸다.

앞에서는 세라트린이 다시 자세를 잡고 주위를 돌고 있었다. 주먹에는 창을 움켜쥐었고, 완갑에서는 기묘한 내면의 빛이 희미하게 흘렀다. “창은 내 것이다.” 그가 침을 튀기며 말했다. “네게는 넘기지 않겠다.”

그가 다시 창을 찔렀다. 이번에는 시그리스가 옆걸음으로 피하며 왼쪽을 지나가게 했다. 동시에 몸을 돌려 방패 가장자리 너머로 검을 휩쓸듯 휘둘렀다. 조수 벨라메가 자기 칼날로 검을 가로막아 궤도를 비껴 내지 않았다면 세라트린의 머리를 둘로 갈랐을 일격이었다.

두 칼날이 푸른 리아스트룸 빛을 뿜으며 부딪혔다. 하지만 시그리스가 내리누르는 힘을 견디지 못한 벨라메의 미숙한 손가락에서 검이 빠져나가 자갈 위로 미끄러져 날아갔다. 시그리스는 몸을 돌려 남자의 턱 아래를 안드라본으로 올려쳤다. 그의 머리가 뒤로 꺾이며 널브러진 시체 하나 위로 나가떨어졌다.

몸을 돌리자마자 세라트린이 또다시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은 차갑고 얼굴은 비웃음으로 일그러졌으며 입술은 뒤로 말려 드러난 이를 비췄다. 세련된 기색이라고는 전부 사라지고 갑작스러운 살의에 사로잡힌 야수처럼 보였다.

시그리스가 물러나는 순간 다시 창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창에서 일렁이는 빛이 푸를 뿐만 아니라 소용돌이치는 검은빛까지 띠었다. 마치 그림자 자체가 일어나 유산의 마법에 몸을 묶은 듯했다.

시그리스는 검을 쥔 팔을 들어 일격을 막았지만, 리아스트룸이 일렁이며 세라트린의 창끝을 더 멀리 뻗었다. 창끝은 그녀의 위팔을 스쳤고, 그녀는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스피어 비르탄의 마법사들은 다른 동료들보다 근접전에서 비전의 힘을 능숙하게 휘두르는 듯했다.

시그리스는 다시 힘을 내 넓은 궤적으로 칼날을 휘둘렀다. 세라트린은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을 물러나며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창을 제대로 쓰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는 솜씨 좋은 전사였다. 그를 필사적으로 몰아붙이는 분노가 분명했는데도 시그리스의 공격을 하나하나 막아 냈다.

주위에서는 결사회의 마법사들이 아군에게 난폭한 폭풍을 퍼부으며 푸른빛으로 허공을 태웠다. 기사 한 명은 가슴이 지글거리는 피의 폭발과 함께 터져 쓰러졌다. 근처의 또 다른 기사는 순수한 리아스트룸 광선이 뒤통수를 관통하자 한숨을 내쉬고는 조탄의 부하 시체 위에 힘없이 무너졌다.

두 사람 모두 교단에서 오스바운드 라이트를 가장 능숙하게 다루는 자들도 치유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이제 격전은 두 탐색자를 둘러싸고 가까이까지 밀려들었다. 성스러운 강철이 결사회의 리아스트룸 깃든 무기와 부딪혔다. 오른쪽을 황급히 흘겨본 시그리스는 기사 셋이 적을 쓰러뜨린 뒤 훤히 노출된 모습을 보았다. 그들 주위에서 결사회 마법사들은 일렁이는 푸른빛의 폭풍을 또 하나 빚고 있었다. 기사들은 무기를 치켜든 채 둥글게 모였지만 적 마법사들과의 거리를 좁힐 시간이 없었다.

시그리스는 신음하며 안드라본을 앞으로 내질렀다. 방패가 힘으로 진동하며 세라트린을 들이받자 그가 뒤로 밀려났고, 그녀는 잠시 얻은 틈에 동료 기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힘찬 세 걸음 만에 전장을 가로지른 그녀는 안드라본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방패를 중심으로 밝게 반짝이는 빛의 장막이 눈부신 방벽처럼 뻗어 나와 기사 셋을 보호하듯 감싸 안았다. 바로 그 순간 마법사들의 주문 직조가 절정에 달했다.

말레딕션 공식 삽화 — Ward of Valcaris 1

일렁이는 푸른빛이 치명적으로 지글거리는 파도처럼 빛나는 반구를 훑었다. 안드라본의 빛이 사그라들자 그 힘도 타들어 가는 듯한 쉭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기사 셋은 시그리스의 이름으로 성스러운 진언을 외치며 흩어졌고, 무기를 치켜든 채 적의 피를 찾아 나섰다.

시그리스는 움직임을 느끼고 왼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는 걸 알았다. 동료 기사들을 보호하려다 자신의 빈틈을 드러냈다.

세라트린의 창끝이 시그리스의 골반을 비스듬히 스치며 뼈에 닿을 만큼 깊이 베었다. 파직거리는 마법은 움켜쥐는 손처럼 뻗어 그녀를 휘감고, 닿는 곳마다 지직거리며 살을 태웠다. 시그리스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뒤로 넘어졌다. 비틀거리면서도 방패를 들어 세라트린이 분명 이어 올 공격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공격은 오지 않았다.

시그리스는 고통스러운 눈으로 결사회의 탐색자가 자신에게서 돌아서서 창을 들어 가장 가까운 다른 전투원을 마구 찌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기사 한 명이 가슴을 관통당해 쓰러졌다. 세라트린은 사악하고 환희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시체를 두 번, 세 번 더 찔렀다. 그런 다음 다음 사람에게, 또 그다음 사람에게 몸을 날렸다. 두 사람 모두 결사회 비르탄의 문장을 달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차례차례 달려들어 사납고 치명적인 존재가 되어 그들을 공격했다. 세라트린의 창끝에서는 푸르고 검은 마법이 파직거렸고, 역겨운 화상을 남기며 죽은 이들의 시체를 더럽혔다. 나머지는 눈을 크게 뜨고 항변하며 비틀비틀 물러났다.

시그리스가 움직이려 하자 골반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무슨 일이든 다음에 닥칠 것에 대비했다.

세라트린은 끝없이 창을 찌르고, 죽이고, 길을 막는 자라면 누구든 굶주린 창으로 꿰뚫었다. 시그리스의 기사들은 말로의 지휘에 따라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조탄과 그 부하들에게 닥친 일이었다.

이것이 카디사르의 창에 걸린 저주였다. 치명적인 광기. 죽음을 안기려는 헤아릴 수 없이 끝없는 굶주림.

시그리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결사회 마법사들은 마스터에게 등을 돌렸다. 살해자가 된 자에게 있는 힘을 모두 쏟아 내자, 물결치는 푸른빛이 협곡을 가득 채웠다.

시그리스는 왼쪽 다리를 끌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다가 안드라본을 들어 쓰러진 기사 둘을 보호했다. 두 사람은 시체 사이에 누워 끔찍한 상처를 움켜쥐면서도, 교단을 섬기는 자들 특유의 집요함으로 삶을 붙들고 있었다.

하늘이 세상 것 아닌 리아스트룸의 빛으로 타올랐다. 그 대화재 한복판에서도 세라트린은 살아 있는 자들을 집요하게 뒤쫓았다. 자기편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기쁨에 겨워 고개를 젖히고 몇 번이고 돌격했다. 파직거리는 마법이 살갗을 층층이 벗겨 내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그가 몸을 돌렸다. 죽은 자들이 널린 전장 건너편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조탄이 그러했듯, 의지가 너무 나약해 다룰 수 없는 유산에 잠식된 그에게 인간성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웃더니 시그리스에게 등을 돌리고 끔찍한 일을 계속했다.

다시는 내게 등을 돌리지 못하게 하겠어.

시그리스는 달렸다.

골반에서 폭발한 고통은 너무도 날카롭고 극심해서 잠시 새하얗게 타오르는 빛이 시야를 흐렸다.

그녀의 뒤에서 부상당한 기사 둘이 거친 리아스트룸의 푸른 섬광에 집어삼켜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그녀는 달렸다.

방패를 든 팔을 내리며 검을 위로 크게 휘둘렀고, 영생자를 향한 기도를 고함쳤다.

세라트린이 그녀를 맞으려고 몸을 돌린 순간, 벨라메가 사악한 곡선 단검을 움켜쥐고 자기 마스터에게 몸을 날렸다.

단검은 세라트린의 어깨 깊숙이 박혔다. 그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홱 돌렸고, 시그리스가 다다른 바로 그 순간 무방비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검에는 몸속을 흐르는 오스바운드 라이트가 눈부시게 빛났다. 바로 그때 세라트린은 배신한 부하를 공격하려고 팔을 뻗었다.

축축한 퍽 소리와 함께 세라트린의 살과 뼈가 갈라졌다. 시그리스가 그의 팔을 팔꿈치 위에서 잘라 내자 동맥혈이 고운 안개처럼 뿜어졌다. 잘린 팔뚝은 손목에 감긴 완갑과 손에 쥔 창과 함께 땅에 쿵 떨어졌다.

세라트린은 돌아보며 입을 떡 벌렸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려 애쓰며 아래턱을 들썩였다. 하지만 시그리스는 칼날을 위로 홱 돌려 그의 목을 그었다. 머릿속에는 영생자의 자비로운 정의뿐이었다. 그러고는 안드라본으로 훼손된 육신을 밀쳐 냈다.

세라트린은 경련하며 땅에 쓰러져 움직임을 멈췄다. 근처에서 벨라메는 땅바닥에 쓰러져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단검은 여전히 마스터의 어깨에 박혀 있었다.

시그리스는 잠시 세라트린의 시체 위에 서서 또 한 번 소리 없는 기도를 읊었다. 주위의 협곡은 불과 몇 순간 전 벌어진 끔찍하고 잔혹한 일 뒤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부자연스러운 침묵에 잠겼다.

결사회 마법사들은 죽었거나 마법을 멈춘 상태였다.

시그리스는 몸을 돌렸다. 흰 수도복과 얼굴, 양팔에는 검붉은 피가 튀어 있었다. 근처에서는 말로가 살아남은 마지막 기사들을 더 안전한 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결사회 마법사는 세 명만이 살아남았고, 그 곁에서 벨라메가 불안정하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시그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법사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완전히 항복한다는 뜻으로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채, 이곳에서 목격한 참상에 아직도 떨고 있었다.

벨라메는 말을 꺼내려는 듯했지만 어떤 말도 만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시그리스는 그들을 무시하고 검을 칼집에 넣었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세라트린의 죽은 손이 매끈한 금속 자루를 붙들고 있는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내며 창을 뽑아 들었다.

유산의 힘이 창을 타고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도 굶주린 채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떨며 겉옷을 잡아당겨 찢어 낸 뒤 서둘러 창을 감쌌다. 다시는 맨손으로 붙들지 않을 작정이었다. 세라트린이나 그 이전의 조탄처럼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려웠기에, 그토록 강한 힘에 맞서 자기 의지를 시험하지 않으리라. 유산은 오염된 상태였다. 그녀는 창을 정당한 자리인 웰스테드 가문으로 돌려보낼 것이고, 가문에서는 성스러운 루시디에게 가져가 오스바운드 라이트로 정화하려 할 터였다.

시그리스는 휘청이며 한 걸음을 내딛고 골반의 날카로운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바로 그때 말로가 황급히 달려왔다. 고통과 출혈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바람에 그의 상투적인 위로는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부인. 잠시 쉬셔야 합니다.”

그녀는 말로가 이끄는 대로 전장 가장자리, 살아남은 일행이 모인 곳으로 갔다.

결사회 마법사 셋은 자신들이 포로라고 생각한 듯 불안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어떤 명령을 내릴지 기다리고 있었다. 시그리스는 그들을 죽이라고 명령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너무 많은 것을 보았다.

하지만 오늘 이미 충분히 많은 이가 죽지 않았나? 그들도 진정한 적인 자기 탐색자를 물리치는 일을 돕지 않았나?

말로는 자기 망토를 벗어 그녀의 허리에 둘러 상처 입은 골반을 압박했다. 치유사가 손쓸 때까지 피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가 망토를 팽팽히 조이자 그녀는 고통에 신음했다.

시그리스는 시야 한구석에서 움직임을 느꼈다. 벨라메가 마스터의 잘린 팔 앞에 쭈그리고 앉아 손목에서 완갑을 떼어 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시그리스는 지친 신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자기 보존의 욕구도 한몫했던 셈이었다. 아니면 이 마법사는 그저 마스터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보았을지도 몰랐다.

그들을 죽여야 할 또 하나의 이유였다.

하지만 벨라메의 행동은 시그리스가 한 일과 똑같지 않은가? 자기 동족의 유산을 차지하고, 본래 그들 소유인 것을 되찾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남자는 결정적인 순간에 세라트린의 주의를 흩뜨려 그녀가 마스터를 쓰러뜨리도록 도왔다. 그는 시그리스의 부하가 훨씬 더 많이 죽는 것을 막았다.

물론 교단의 많은 이가 다르게 생각하리라는 걸 알았다. 무기고에 보관할 귀중한 보물을 손에 넣을 의무를 저버렸다고 비난할 터였다.

“치유사를 데려오겠습니다, 부인.” 말로가 말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시그리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벨라메는 자기 손목에 완갑을 끼우더니 일어서서 결사회 마법사 셋에게 손짓했다.

“도망가려 하는구나.” 익숙하게 우르릉거리는 목소리로 안드라본이 말했다. “그리하여 너는 또 하나의 선택을 마주한다.”

시그리스는 한숨을 쉬었다. 어떤 선택이 놓였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안드라본에게 말하라고 했다. “계속하십시오.”

“달아나는 자들을 베어 버리고 창뿐 아니라 적이 아끼는 완갑까지 지닌 채 의기양양하게 차른으로 돌아가라. 물론 그러면 스피어 비르탄의 분노에 불을 붙이게 될 것이다.”

“아니면요?”

안드라본이 망설이는 것이 거의 느껴질 듯했다. “아니면 저들을 살려 두고 완갑과 함께 달아나도록 허락할 수도 있다. 저들은 이곳에서 일어난 죽음에 관해 너에게 악의를 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비를 베풀기로 한다면 언젠가 네 목숨도 저들의 자비에 달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시그리스는 마지막으로 상크토룸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전령이 건넨 작별의 말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어느 길을 걸을지는 오직 너만이 정할 수 있어, 시그리스. 안드라본이 네 안내자일 수는 있지만, 인과의 흐름을 해석하는 솜씨가 아무리 뛰어나도 선택이 지닌 도덕적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오직 뿐이야. 때로 방패는 쉬운 길을 가라고 재촉하겠지만, 가장 힘든 길이 네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이라는 걸 너는 더 잘 알겠지.”**

시그리스는 바위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발소리가 다가오며 흩어진 자갈을 밟아 으스러뜨렸다. 말로와 치유사였다.

“부인.” 말로는 달아나는 결사회 전투단의 잔당을 칼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뒤쫓을까요?”

선택의 여지는 없다고 시그리스는 생각했다.

“보내 주세요.” 그녀가 대답했다. 벨라메는 마법사 셋을 이끌고 떠나다가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그는 더없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살려 보내서 훗날 다시 싸우게 합시다.” 치유사가 허리에 둘러 놓은 임시 지혈대를 풀기 시작하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가 웃었다. “저도 다쳤으니까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창이 있습니다.” 말로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시그리스는 과연 누구든 그녀의 선택을 진정으로 이해할지 궁금했다.

“그렇지요.” 시그리스는 미지의 미래 어느 날 그 순간이 마침내 찾아오면 벨라메도 같은 자비를 베풀지 생각하며 동의했다. “우리에게는 창이 있습니다.”

치유사의 마법이 따뜻한 포옹처럼 주위를 감싸자 시그리스는 고마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뒤 치유사는 물러나며 짤막하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그리스도 고개를 끄덕이고 치유 상태를 확인하려고 다리를 굽혔다 폈다. 며칠 동안은 욱신거리겠지만 당장은 충분했다. “말로 경.” 그녀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일으켜 주세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팔에 걸린 안드라본에서 조용한 즐거움이 느껴졌다.

때로는, 전령의 말이 아직도 마음에 메아리치는 가운데 그녀는 생각했다. 가장 힘든 길이 네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이다.

그보다 참된 말은 없었다.

그녀는 앞에 놓인 길고 구불구불한 길에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디뎠다.

말레딕션 공식 삽화 — Sigrith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