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레크의 시선
The Gaze of Molech
“준비됐나, 견습생?”
아니요. 벨라메는 생각한다. 하지만 입 밖에 낼 수는 없다. 십 년 가까이 자신의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을 지배해 온 마법사 앞에서는 더더욱.
대신 턱을 악물고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겁먹은 아이처럼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도록 애쓰면서.
“예, 세라트린 마스터님.”
마법사의 얇고 잔인한 입술 끝에 비뚜름한 미소가 걸린다.
“그래야겠지. 너를 시궁창에서 끌어내려고 내가 얼마나 희생했는데.”
세라트린의 회색 눈이 벨라메를 지나 그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올리브색 피부의 견습생에게 향한다. 똑같은 로브를 입은 그의 허리에는 빈 청동 구체가 달려 있고, 흔들리는 벽등의 불빛이 그 표면을 스친다.
“너도 마찬가지다, 카엘리스.”
“물론입니다, 마스터님.” 동료 견습생이 언제나처럼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세라트린이 낮게 웃는다. “네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내게는 별 상관이 없다. 걸린 것은 너희 목숨이니까. 아니, 제정신이라고 해야 하나.” 차가운 눈이 다시 벨라메에게 향한다. 태연한 척하는 모습에 조금이라도 균열이 있는지 찾는다. 벨라메는 무표정한 가면을 쓴 채 앞만 바라본다.
정신 차려, 벨. 저 사람을 기쁘게 해 주지 마.
친구의 얼굴에 떠올랐을 재미있다는 표정이 보이는 것만 같다. 늘 한결같은 카엘리스. 언제나 느긋하고,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다.
자신과는 달리.
세라트린이 콧방귀를 뀐다. 마침내 장난에 싫증이 난 모양이다. 이제 돌아갈 길은 없다. 스승은 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려 대기실을 성큼성큼 나간다.
마법사의 날카로운 발소리가 멀어지고서야 벨라메는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침묵은 고작 삼 초를 버틴다. 카엘리스가 코웃음을 터뜨린다. “고약한 자식. 도무지 참질 못한다니까. 하필 오늘 같은 날에도.”
벨라메가 홱 돌아본다. “조용히 해. 들리겠어!”
카엘리스는 재미있다는 듯 눈썹을 치켜든다. “다른 마스터들한테? 지금쯤 다들 관람석에 편안히 앉아서 우리가 시련을 이겨 내는지 기다리고 있겠지…….”
“아니면 평생 허깨비랑 대화하며 살게 되는지.”
카엘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영생자들이시여! 정말로 네 뇌가 귓구멍으로 줄줄 흘러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몰레크를 봐서라도 그러지 좀 마, 벨라메.”
“카엘리스, 우리는 이제 시련을…….”
“그 무시무시한 몰레크의 시선을 마주하러 가노라.” 친구가 장중하게 읊으며 두 팔을 활짝 편다. 잔뜩 경외심에 사로잡힌 지망생들로 가득한 경기장을 향해 연설이라도 하는 듯하다.
“진지하게 생각하라고!”
“물론 진지하지. 그래서 지난 십 년간 매일 수련했잖아. 너는 대부분의 사람보다 더 열심히 했고.”
“그래야 했으니까. 난 너랑 달라.”
카엘리스가 그의 어깨를 잡아 세게 쥔다.
“넌 나랑 똑같아. 다만 나만큼 잘생기지 않았을 뿐이지.”
미소가 더 크게 번진다. 처음 만났던 오래전 그날처럼 지금도 절로 따라 웃게 만드는 미소다. “넌 할 수 있어, 벨. 내가 장담할게.”
등 뒤에서 오라클의 방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이 신음하며 열린다. 낡은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안쪽 회랑에 울려 퍼진다.
농담은 사라진다. 카엘리스의 미소가 작아지지만 따뜻함은 그대로다.
“가. 네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 줘. 난 여기서 기다릴게.”
처음 만났을 때 둘은 열네댓 살을 갓 넘긴 소년들이었다. 이제는 정확히 기억하기도 어려웠다. 리아스트룸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 조금씩 변하다 보면 나이 같은 일상의 사소한 문제는 잊게 되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내내 이름을 들어 왔던 게이트웨이에 처음 도착한 기분은 기억했다. 요동치는 바다를 끼고 선 그 도시는 시골에서만 살던 그에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돌과 돛천, 기회가 끝없이 펼쳐진 곳이었다. 붐비는 거리는 고함치는 노점상, 비바람에 거칠어진 선원, 눈을 휘둥그레 뜬 지망생들로 꽉 차 있었다. 항구의 새들은 우리 안에 빽빽이 갇혀 있었고, 공기 중의 짠 물보라에는 생선과 땀, 절박함의 악취가 뒤엉켰다.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있다는 약속에 이끌려 위스트랄 곳곳의 사람들이 퀸발라 해안으로 몰려들었다.
그 같은 사람들. 장화에는 먼지가 묻고 머릿속에는 꿈이 가득한, 빼빼 마르고 왜소한 소년들.
결사회에 들어가는 꿈.
마법사가 되는 꿈.
그가 바란 것은 늘 그것뿐이었다. 사실 아버지 탓이었다. 오랜 세월 어린 벨라메의 머릿속을 이야기와 경이로 채워 놓더니, 때가 오자 집안의 돈을 몽땅 털어 게이트웨이로 안전하게 갈 여비까지 마련해 주었다.
넉넉히 가진 형편도 아니었는데.
늙은 행상인의 목소리에 담겼던 자부심이 아직도 들리는 듯했다. 눈물 어린 두 눈에 반짝이던 물기도 보였다.
“내 아들이…… 견습생이라니. 마법사라니. 넌 큰일을 할 거다, 얘야. 우리 같은 사람을 지켜 주겠지. 나랑 네 늙은 엄마를.”
“누가 늙었다고 그래.” 어머니가 타박하고는 그의 머리에 짧게 입을 맞췄다.
하지만 쓰러져 가는 오두막 문간에 서서 배웅할 때는 어머니도 눈물을 흘렸다. 한 손은 작별 인사로 들어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흐느낌을 틀어막은 채.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길을 걸었다. 적어도 여정의 일부는 태워 주기로 한 수레 행렬을 향해서.
그것이 오 주 전이었다. 꼬박 한 달 동안 결사회의 문 앞으로 성큼 걸어가 견습생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순간을 상상했다.
현실은 생각보다 품위가 없었다. 붐비는 거리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밀리며 사방에서 감각을 두들겨 맞았다. 외침과 고함과 비명. 씻지 않은 몸뚱이와 김이 오르는 오물 구덩이의 악취.
“실례합니다.” 그는 끊임없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물었다. “마스터들은 어디서 만날 수 있나요? 스피어에는 어디서 지원하죠?”
잘해야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지나쳤다. 심하면 툭 쳐서 밀어냈다. 성가심에 시달리던 부두 노동자 한 명은 너무 세게 밀어서, 벨라메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 똥 더미에 얼굴부터 처박혔다.
그때 허리춤에 손이 닿았다. 돈주머니를 노리는 손이었다. 벨라메는 오물을 뱉어 내며 가느다란 손목을 움켜쥐었다. “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일으켜 주려는 거지, 당연히.” 도둑질에 실패한 소년이 손을 홱 빼며 말했다. “뭘 하려는 줄 알았는데?”
“내 돈을 싹 털려던 거겠지.” 벨라메가 쏘아붙이며 그제야 상대를 제대로 보았다. 맨발에 마른 몸. 자신보다 한 살이나 많을까 싶은 소년이었다. 팔꿈치는 뾰족하고 뺨은 핼쑥했으며, 때 묻은 얼굴 사이로 밝은 파란 눈이 반짝였다.
“아니라니까. 일으켜 주려고 했잖아?” 거리의 소년이 손목을 문질렀다. “해칠 생각 없었어. 게다가,” 소년은 앞으로 익숙해질 얄미운 웃음을 때 묻은 얼굴에 띠며 덧붙였다. “그렇게 빈털터리인 돈주머니 훔쳐 봤자 뭘 해. 여기 오느라 마지막 동전까지 다 쓴 모양이지?” 벨라메는 여전히 이 소년을 믿어도 될지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왔어?”
“아나스트레인에서.”
소년이 휘파람을 불었다. “먼 길도 왔네. 마법사 되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겠지.”
벨라메는 주위를 뒤덮은 혼란을 둘러보았다. “그거 말고 이런…… 이런 데 올 이유가 있어?”
“지옥 구덩이에?”
벨라메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이제 좀 알겠네.” 카엘리스가 웃으며 말했다. “게이트웨이는 이미 부자인 놈들한테나 근사한 곳이야. 저 탑 안에서는 동전을 세고, 여기 밑바닥에서는 벼룩을 세지.” 소년이 손을 내밀었다. “난 카엘리스야. 넌…….”
“엉망진창이지.” 벨라메는 소년이 잡아당기는 대로 일어서며 말했다. “이럴 줄은 몰랐어.”
“원래 기대대로 되는 법은 없지, 친구.” 새로 사귄 친구가 등을 세게 두드렸다. 하마터면 다시 그 갈색 더미 속에 처박힐 뻔했다. “여기서는 특히 그래. 다른 자식이 네 돈주머니에 남은 것까지 훔쳐 가기 전에, 이 동네가 어떤 곳인지 알려 줄 테니 따라와.”
어린 도둑은 약속을 지켰다. 들키지 않고 음식을 훔치는 법, 피해야 할 모퉁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법사를 엿보기 가장 좋은 장소까지, 거리에서 살아남는 법을 벨라메에게 가르쳐 주었다!
“저기 한 명 있다.” 어느 날 카엘리스가 항구를 따라 인파를 헤치고 가는 검은 로브 차림의 인물을 가리켰다.
“뭐가 한 명 있다는 거야?” 벨라메가 곱슬머리와 매끈한 얼굴, 차가운 눈 밑에 발린 짙푸른 화장 자국을 살피며 물었다.
“마스터.”
벨라메가 눈을 깜빡였다. “좀 더…… 나이가 많을 줄 알았는데.”
카엘리스가 키득거렸다. “긴 흰 수염에 티 하나 없는 로브?”
벨라메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뭘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어. 그냥 너무…… 평범해 보여.”
“제발 그 소리 듣게 하지는 마라. 이름은 세라트린이야. 성질 더러운 인간이지. 그래도 눈에 띄고 싶으면 저 사람이 제일 가망 있어. 허리띠에 찬 구체 보여?”
“금 같네.” 벨라메가 정교한 구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황동이야. 하지만 여기서 아스타리스까지 통틀어 어떤 귀금속보다도 값지지.” 카엘리스가 바짝 다가와 비밀을 나누듯 목소리를 낮췄다. “마법을 담아 두는 곳이거든.”
“그걸 어떻게 알아?”
“난 귀를 땅에 바짝 대고, 얼굴은 돼지 똥에서 멀리하니까. 이 형님 믿어, 벨 꼬마야. 우리 로브를 얻으려면 저 사람 눈에 들어야 해.”
벨라메는 여전히 미심쩍었다. 남자의 허리께 구체에서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빛이 맥동하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그 낯선 자에게서는 어린 시절 들은 이야기와 닮은 구석을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이야기 속 마법사들은 거의 신이었다. 일상의 고된 노동과 상처에서 스스로 벗어나 제 운명을 거머쥔 사람들이었다.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진보와 운명을 다스리는 주인이었다. 자기 뜻대로 세계를 굽히는 그들은 사람이 타고난 처지를 넘어설 수 있다는 증거였다.
그들은 찬란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이 세라트린은…… 어리석게도 가까이 다가오는 누구에게나 신경질적으로 짖어 댔다. 거지든 지망생이든, 짜증스러운 손짓과 매서운 말로 쫓아냈다.
“꺼져라. 비켜.”
청원자들에게 쏘아붙이지 않을 때는 뒤따르는 불꽃색 머리 소년에게 고함을 질렀다. 소년은 두 팔 가득 두꺼운 책과 두루마리를 짊어진 인간 짐승처럼, 세라트린의 긴 보폭을 따라가려 애썼다.
“몰레크를 봐서라도 그만 꾸물거려라, 드렌. 바히구진을 데려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마스터님. 더 잘하겠습니다, 마스터님.”
“그래 준다면 놀랍도록 기쁜 일이겠구나.”
“예, 예, 마스터님. 당장 하겠습니다, 마스터님.”
벨라메는 카엘리스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느꼈다.
“실망했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전에도 봤지.” 카엘리스가 코웃음 쳤다. “너 같은 시골뜨기들이 영웅을 기대하며 도시에 왔다가 발견하는 건…… 뭐, 세라트린 같은 고약한 멍청이들이지.”
벨라메는 뒤따르는 소년을 턱짓했다. 얼굴이 머리카락만큼이나 빨개져 있었다. “그럼 저쪽은…….”
“그 고약한 멍청이의 용감하고 고귀한 견습생이지. 두루마리 하나만 휙 얹으면 풀썩 무너질 것 같은데. 저건 사는 게 아냐. 확실해.”
벨라메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넌 견습생이 되고 싶다며.”
“당연하지. 너랑 똑같아. 스피어에서 사는 건 끔찍한 구경거리야, 벨, 내 친구. 널 씹어 먹고 뱉어 버리겠지. 하지만 이 동네에서 진짜 힘을 얻을 방법은 내가 아는 한 그것뿐이야. 그 체제가 널 짓밟기 전에 네가 먼저 이겨 먹으면 돼.”
벨라메는 속이 메슥거렸다.
“참 쉽게 말한다.”
“쉽다니까.” 카엘리스가 얄밉도록 안심되는 미소를 또 지으며 장담했다. “들어갈 길만 찾으면 돼.”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문제였다. 세라트린은 누구도 가까이 오게 두지 않았고, 드렌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바삐 지나가자 카엘리스가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며 불러 보았지만, 다른 이들처럼 무시당할 뿐이었다.
벨라메는 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매 순간 희망이 사그라졌다.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을까? 더러운 길 위에서 꿈이 부서지는 이 꼴을 보려고 가족의 얼마 안 되는 저축을 탕진한 걸까?
바로 그때였다.
그의 삶이 바뀐 순간이었다.
드렌의 허리띠에 달린 열린 가방에서 작고 반짝이는 물건 하나가 미끄러져 나와 자갈길을 통통 튀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모두 카엘리스처럼 세라트린의 관심을 끌려고 애쓰느라 바빴다.
벨라메가 몸을 굽혀 물건을 주웠다. 손바닥보다 작고, 세라트린의 구체와 같은 황동으로 만든 원반이었다. 정교한 룬이 금속 표면을 나선으로 휘감았다. 살아 있는 것처럼 비틀고 꿈틀거리며, 영원히 제 꼬리를 쫓는 뱀들이 둥지에 뒤엉킨 듯했다.
벨라메는 갑자기 두려워져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물건은 손안에서 고동쳤다. 뜨거우면서 동시에 차가웠다. 땅에 던져 버리고 돌아서 달아나고 싶었다. 마법사가 되겠다는 생각 따위는 모조리 잊고 싶었다.
이것이 마법이라면…… 이것이 리아스트룸이라면, 아무 상관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움직일 수 없었다. 손가락은 부자연스러운 금속을 움켜쥔 채 굳었고, 시선은 뒤틀리는 룬 속으로 점점 깊이 가라앉았다.
“뭘 들고 있어?”
어느새 카엘리스가 옆에 돌아와 있었다. 원반을 보자 눈이 커졌다.
“모르겠어.” 벨라메가 말을 더듬었다. “드렌의 가방에서 떨어졌어. 그냥 거기 있기에…….”
카엘리스는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벨라메의 손에서 유물을 낚아채더니 몸을 휙 돌려 팔을 번쩍 들었다.
“세라트린 마스터님! 세라트린 마스터님! 이거 마스터님 물건 같은데요.”
카엘리스의 거친 목소리에 담긴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원반에서 고동치는 기이한 기운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세라트린은 카엘리스가 든 물건을 보려고 홱 고개를 돌렸다.
눈 깜빡할 사이 마법사가 움직였다. 벨라메의 눈이 쫓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붐비는 거리를 가로질렀다.
“내놓아라.” 그가 으르렁거리며 당연히 받으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물론입죠, 마법사 나리.” 카엘리스는 일상적인 일이라도 되는 듯 익살을 부렸다. “견습생분이 떨어뜨리셨더라고요.”
마스터의 시선이 드렌에게 꽂혔다. 붉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마스터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세라트린이 다시 카엘리스를 보았다. “내 멍청한 견습생이 이…… 물건을 잃어버리는 걸 봤다고?”
“제가 아니라요.” 카엘리스가 때 묻은 엄지로 벨라메를 가리켰다. “저기 제 친구가요.”
날 끌어들이지 마. 세라트린의 날카로운 눈이 뽑힌 칼처럼 자신에게 향하자 벨라메는 생각했다.
“사실이냐, 얘야? 네가 그렇게 보았느냐?”
“제 눈으로 똑똑히 봤답니다.” 벨라메가 소리도 내기 전에 카엘리스가 말했다. 말하는 법을 잊은 듯했으니 다행이었다. 벨라메는 페일 익스팬스만큼 바싹 마른 입을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세라트린은 얼굴에 비해 헤아릴 수 없이 늙어 보이는 눈으로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카엘리스가 옳았다. 세라트린에게는 겉보기와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뭔지 아느냐?” 마스터가 다시 카엘리스를 보며 물었다.
“비싼 거요.” 도둑이 씩 웃었다.
세라트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비싸지. 인장이다. 일종의 열쇠지. 이걸 가진 자는 내 개인 연구실에 들어갈 수 있다.”
“엉뚱한 손에 들어가면 안 되는 물건이네요.” 카엘리스가 짐짓 엄숙하게 원반을 건넸다.
“절대로 안 되지.”
불쌍한 견습생은 당장 쓰러질 듯했다. 세라트린의 책들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그 자리에서 몸을 움츠렸다.
“가방에서 떨어진 모양입니다, 마스터님. 끔찍한 실수지만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약속드립니다.”
“네 말이 맞다.” 세라트린이 소년을 향해 홱 돌아섰다. “다시는 없겠지. 이렇게 간단한 일도 맡길 수 없는데 스피어 비르탄의 비밀을 어떻게 맡기겠느냐?”
어느새 세라트린의 손은 비어 있었다. 인장은 사라졌지만 마스터의 분노는 그대로였다.
“너의 견습 생활은 끝이다.”
“하지만 마스터님, 지금까지 함께 겪어 온 일이…….”
“함께란 없다, 드렌. 네 끝없는 무능으로 위반한 계약만 있을 뿐이다. 그 계약은 이제 무효다. 결사회의 문은 네게 닫혔다. 네가 빚진 모든 것을 전액 갚아라. 내 시간도. 내 리아스트룸도.”
드렌은 입을 소리 없이 달싹이다가 마침내 가련한 변명을 내놓았다.
“가, 갚으라고요? 하지만…… 어떻게요? 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스터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라트린이 턱을 더 높이 치켜들었다. “그렇다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공장에서 일해라. 베일로르 마스터 밑에서.”
소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안 됩니다. 제발요. 거긴 못 돌아갑니다. 다시는요. 못 해요. 저는…… 안 갈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달렸다. 책들은 여전히 끌어안은 채였다. 구경하던 군중이 갈라졌다.
벨라메는 세라트린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눈부신 푸른 광선이 허공을 꿰뚫고 드렌의 두 견갑골 사이에 꽂히는 모습은 똑똑히 보았다. 견습생이 비명을 질렀다. 땅바닥에 세게 처박히자 세라트린의 책들이 품에서 쏟아졌다. 그을린 살갗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항구가 조용해졌다. 자갈길에 엎드린 드렌의 흐느낌만 들렸다.
세라트린은 소매에서 보풀을 떼며 콧방귀를 뀌었다. “해 질 때까지 베일로르 마스터에게 출두해라. 아니면 숨어 있는 곳으로 주문결속체가 찾아갈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답은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벨라메를 향해 돌아섰다.
“이름이 뭐냐, 얘야?”
“베…… 벨라메입니다.”
“저는 카엘리스고요.” 새로 사귄 친구가 재빨리 덧붙였다. 처음으로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책과 두루마리를 가져와라.” 세라트린이 명했다. 이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결사회를 향해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뭐? 우리더러?” 벨라메가 숨죽여 말했다.
“당연히 우리지.” 카엘리스가 무거운 책들을 팔에 쓸어 담으며 속삭였다. “가방도 챙겨.”
벨라메는 시키는 대로 했다. 가죽 가방을 낚아채며 흐느끼는 드렌의 몸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군중의 시선을 외면하고 카엘리스 뒤를 허둥지둥 따랐다. 마스터는 앞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벨라메가 따라잡으려고 서둘러 보조를 맞추자 어린 도둑이 말했다. “친구야, 바로 이렇게 해야 눈에 띄는 거야.”
카엘리스는 늘 그렇듯 옳았다. 하지만 퀴퀴한 책 더미를 나르는 것만으로는 결사회의 문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당연했다. 견습생을 변덕으로 뽑지는 않았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먼저 시험이 이어졌다. 수수께끼를 풀고 육체적인 시련을 견뎌야 했다. 카엘리스의 미심쩍은 재주를 십분 활용하는 비밀 임무도 있었다. 세라트린은 두 사람을 도서관과 개인 소장품 보관소에 몰래 들여보내, 눈여겨보던 유물과 고문서를 훔쳐 오게 했다. 정식 경로로는 구할 수 없는 보물들이었다.
어쩌다 세라트린이 리아스트룸의 힘을 잠깐 보여 주는 순간도 있었다. 훔쳐 온 물건을 두 사람의 손에서 공중으로 띄우거나, 푸른 불꽃을 내뿜어 음모의 증거를 태워 버렸다. 언제나 갈망을 꺼뜨리지 않을 만큼만. 그가 견습생으로 선택해 주면 기다리고 있을 영광을 감질나게 엿보여 주었다.
계속 미끼에 매달리게 할 만큼만. 그 기회를 얻으려면 무엇이든 하리라는 것을 증명하게 했다.
기꺼이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 되리라는 것을.
벨라메에게 아직도 의심이 남아 있었을까?
인정하고 싶은 것보다 훨씬 자주 들었다.
그럼에도 카엘리스를 따라 음침한 골목과 화려한 대로를 누비며, 군중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려고 무엇이든 했을까?
두말할 나위 없었다.
세라트린이 명했다는 이유만으로 결사회의 공장에서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매연에 숨이 막히는 나날을 견뎠을까?
망설임 없이.
모든 것이 보답받았으니까. 고통스러운 모든 순간. 따낸 모든 자물쇠. 기절시킨 모든 경비병.
앞질러 따돌린 모든 동료 지망생.
세라트린이 마침내 두 사람을 견습생으로 받아들인 날, 결사회의 문을 지나 다른 세상으로 들어갔던 그날을 벨라메는 결코 잊지 못할 터였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었다.
다른 문이 등 뒤에서 닫히자 벨라메는 숨을 들이쉬며 억지로 정신을 현재로 되돌린다.
이 방에 와 본 적은 있었다. 물론 있었다. 눈부신 오라클을 올려다보며, 청동 고리들에 둘러싸인 거대한 구체가 아무런 물리적 지지대 없이 공중에 떠 있는 모습에 경탄했었다. 리아스트룸이 안개처럼 구체 둘레를 소용돌이치는 광경에도. 결사회 힘의 원천, 몰레크가 직접 남겨 놓은 선물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광경은 숨 막히도록 아름답다. 평소라면 업무를 보거나 원천에서 새로운 양의 가공되지 않은 리아스트룸을 끌어내는 다른 마스터와 견습생들도 함께 보았을 광경이다.
지금은 대성당 같은 공간이 고요하다. 텅 비었다. 그래도 벨라메는 관람석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마스터들의 눈을 느낀다. 틀림없이 세라트린도 그들 사이에 있을 것이다.
혼자다. 어쩌면 수년 만에 처음으로. 늘 어깨 곁에 있던 카엘리스는 이제 문밖에서 자신이 시선을 마주할 차례를 기다린다.
독립된 마스터가 될 기회를.
너희 둘뿐이어서는 안 되지. 어떤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인다. 나도 함께 있어야 하는데.
벨라메가 돌아서서 주위를 살핀다. 아무도 없다. 빛줄기에 색색으로 물든 먼지만 춤춘다. 하지만 냄새가 난다. 희미하지만 익숙한 향기.
황혼박하.
이 향기를 맡아 본 것은…….
베이 이후로 처음이다.
순식간에 방이 사라진다. 벨라메가 몇 달 동안 공들여 만든 청동 구체도 함께 사라진다.
그는 다시 세라트린의 연구실에 있다. 푸른 로브 대신 견습 칠 년 차에 입던 수수한 튜닉을 입었다. 눈앞의 광경을 이해하려 애쓰며 주위를 둘러본다. 카엘리스가 옆에 서서 크림을 차지한 스크리치고양이처럼 씩 웃는다. 다시 젊어진 얼굴에는 지난 몇 년의 고난이 아직 새겨지지 않았다.
“괜찮아, 벨?”
여자의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다.
베이. 베이가 오른쪽에 서 있다. 짧게 자른 머리, 은은하지만 분명한 황혼박하 향기. 걱정 가득한 검은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자 심장이 덜컥한다.
말하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긴장해서 그래.” 카엘리스가 말한다. 수년간 규율에 길들며 억양의 거친 모서리는 닳아 없어졌지만, 벨라메를 감싸려는 본능은 그대로다.
“뭐 새삼스러운 일이라고.” 베이가 중얼거린다. 리아스트룸 구체를 빛내며 엄숙한 얼굴의 세라트린이 성큼 들어오자 고개를 숙인다.
“오늘은 뜻깊은 날이다, 나의 견습생들아.” 스승이 세 사람을 차례로 바라본다. “너희가 내게 더 많은 빚을 지게 되는 날이지.”
“예, 마스터님.” 세 사람이 한목소리로 대답한다.
세라트린이 미소 짓는다. 얇은 입술 둘레에는 최근 기르기 시작한 단정한 수염이 자리 잡았다. 카엘리스가 퍽 재미있어하는 수염이었다.
세라트린이 손을 휘젓자 가까운 선반에서 청동 그릇 세 개가 튀어 올라 각자의 앞에 멈춘다.
마스터는 먼저 카엘리스에게 다가가, 자기 구체에서 리아스트룸 한 줄기를 끌어내 견습생의 그릇으로 흘려보낸다.
선물이 아니다. 결코 선물일 리 없다.
오라클을 들여다본 뒤에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전부 갚아야 한다.
그다음 세라트린은 벨라메 앞을 지나 베이에게 간다. 그릇이 차오르자 베이는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고, 세라트린은 마침내 벨라메를 향한다.
마스터가 눈을 맞춘다. 하지만 구체에서 리아스트룸이 솟아나오지 않는다.
아직은.
“정말 하겠느냐, 벨라메?” 세라트린이 묻는다.
“하겠답니다.” 카엘리스가 끼어든다.
“직접 말하게 둬, 칼.” 베이가 낮게 쏘아붙인다.
세라트린은 아무 말 없이 기다리며 벨라메의 눈에서 답을 찾는다.
입이 바싹 마른다. 목이 조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합니다, 마스터님.” 대답하고 나니 요즘은 거짓말이 얼마나 쉽게 나오는지 스스로 놀랍다.
차라리 괴물의 뱃속에 있는 편이 낫지.
그의 그릇으로 리아스트룸이 흘러들며 달빛처럼 일렁인다. 부자연스러운 빛이 벽에 얼룩을 드리운다.
세라트린은 한 걸음 물러서서 늘 그렇듯 무심하게 제자들을 관찰한다.
“리아스트룸으로 무기를 만들어라. 종류는 알아서 골라라. 단검이든 검이든 창이든, 방패여도 좋다.” 그의 눈이 다시 벨라메에게 머문다. “그리고 이번에는 실패하지 마라.”
카엘리스가 격려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옆에 선 청년이 아니라 부두에서 만났던 악착같은 꼬마의 목소리다.
넌 할 수 있어, 벨 꼬마야. 난 널 믿어.
우리 모두 그래. 머릿속에서 베이가 덧붙인다. 지금처럼 등을 꼿꼿이 세우고 두 손을 뒤로 맞잡은 모습이 아니다. 영원한 밤의 정원에서 그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묻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던 모습이다.
집중해. 벨라메는 자신을 꾸짖는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잖아. 다시는.
창고 문이 활짝 열린다. 세 견습생은 놀라서 그쪽을 본다. 비틀비틀 움직이는 살덩이들이 큰 상자를 끌고 들어온다.
벨라메는 목구멍으로 담즙이 치미는 것을 느낀다.
주문결속체.
바히구진은 언제 봐도 속을 메슥거리게 한다. 때 묻은 두건 아래서 누군가 끝없이 헛기침을 하는 듯한 불길한 딸깍거림이 날 뿐, 그 밖에는 고요하다. 육중한 몸은 기형으로 부풀어 올랐고 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촉수가 꿈틀거린다. 결사회에 들어온 첫날 그것들을 보고 질겁했던 벨라메는 이후로도 그 공포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죽은 자의 살을 빚어 만든 구조체에 불과하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누구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감히 묻는 견습생도 없다. 그저 마스터들을 위해 기꺼이 일하는 종복들의 군대라 여기며, 그 흉측한 존재들을 감내할 뿐이다.
주문결속체들이 수업 공간 앞쪽으로 상자를 옮기는 동안 벨라메는 얼굴에 혐오감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쓴다.
마침내 상자가 자리를 잡자 바히구진들이 왔던 문으로 육중하게 걸어 나간다. 세라트린이 손가락을 튕겨 문을 탁 닫는다.
상자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정말 알고 싶어? 정원에서 베이가 그의 귓불을 이로 살짝 깨물며 묻는다.
상자는 짙은 나무로 만들어졌고, 측면에는 룬이 가득하다. 각각의 문양에서 희미한 리아스트룸 빛이 난다.
“상자 안을 들여다봐라.” 스승이 명한다.
벨라메가 미간을 찌푸린다. 어떻게? 나무는 속이 비쳐 보이지도 않고, 작은 문이나 창도 없다.
“짐승입니다.” 베이가 대답한다. 그릇 속 리아스트룸 위에 손을 띄워 둔 채다. 검었던 눈이 파랗게 변했다.
“팍소스의 숲에서 온 짐승이죠.” 자기 몫의 리아스트룸에서 힘을 끌어내며 카엘리스가 덧붙인다.
세라트린이 답을 기다리며 벨라메를 바라본다. 벨라메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안개가 손가락으로 올라오기를 바란다. 그릇 속 안개는 거의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저는…….” 상자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가 피할 수 없는 사실을 인정한다. “보이지 않습니다.”
베이의 한숨이 들린다. 카엘리스에게서 밀려오는 격려가 느껴진다. 세라트린의 얼굴에는 실망이 보인다.
“시험을…… 시작한다.” 마스터가 날카롭게 말하고, 짜증스러운 손짓으로 문양의 빛을 꺼 버린다.
상자 안에 숨어 있던 무언가가 즉시 깨어난다.
벨라메가 흠칫한다. 다시 오라클의 방이다. 오라클에서 리아스트룸이 맥동한다. 세라트린의 연구실은 사라졌다. 곁에 카엘리스도 없다. 베이는…….
그의 아래에 누워 다리로 그의 다리를 감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또 다른 시험이다. 틀림없이 또 다른 시험이다.
베이가 신음한다.
베이가 비명을 지른다.
벨라메가 침을 삼킨다. 옆에 찬 용기에 손을 얹고 오라클 아래의 계단으로 향한다. 머리 위, 높은 단의 수반 안에서 리아스트룸이 소용돌이친다.
그녀의 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대 앞에 섰나니.” 첫 계단을 오르며 중얼거린다. 카엘리스의 도움으로 외운 말을 읊는다. “모든 힘의 원천이여. 스피어들의 비밀이여.” 계속 올라가는 그의 장화 위로 안개가 흘러간다. “오늘 나는 정당히 내 것인 것을 취한다. 내가 얻어 낸 것을. 내가 명하는 것을.”
그녀가 이름을 부르자 그의 등이 휜다.
안 돼.
단 위에 도착했다. 가장 큰 구체가 머리 위에 있고, 작은 구체들은 아치형 천장을 향해 떠 있다.
바닥에 피가 있다. 그의 발치에.
그는 그 생각을 떨쳐 낸다. 오래전의 일이다.
짐승의 포효.
이 순간을 위해 너무나 열심히 노력했다. 이제 그의 차례다.
벨라메가 수반 위로 손을 들어 올린다.
괴물이 상자 안쪽을 향해 몸을 내던진다.
아니야. 아니, 이건 잘못됐어.
여기서 그릇 속 리아스트룸을 무기로 만들려고 버둥거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미 이 단계를 넘어섰다. 마스터가 되기 직전이다. 시선 앞에 서 있어야 한다.
“타록 야수야.” 옆에서 카엘리스가 말한다. “틀림없어.”
“타록 야수가 아니야.” 베이가 쏘아붙인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너무 높아.”
카엘리스는 두 손 사이에 리아스트룸 공을 띄우고 있다. “넌 타록 야수 소리를 들어 본 적도 없잖아.”
베이는 자신의 연기를 길게 뽑아 자루 모양으로 만든다. “너도 마찬가지야!”
“넌 어떻게 생각해, 벨?” 세라트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엘리스가 묻는다.
“집중하는 중이야.” 벨라메가 날카롭게 답하며 필사적으로 손으로 리아스트룸을 불러낸다. 실낱 같은 몇 가닥만 따른다. 한심하다. 턱없이 부족하다.
드렌이 땅바닥에서 흐느낀다.
낯선 하늘에서 랩터들이 맴돈다.
베이가 그를 숲속으로 이끈다.
상자가 폭발하듯 터진다. 갈고리 같은 발톱이 검은 나무를 양피지처럼 찢어발긴다. 안쪽의 어둠에서 붉은 눈이 타오른다.
“저건……?” 벨라메가 얼어붙어 말을 더듬는다.
“타록 야수네.” 베이가 담담하게 확인한다. 손가락 사이의 자루가 창으로 변한다.
이미 늦었다.
괴물이 상자에서 튀어나온다. 나뭇조각들이 성난 말벌처럼 벨라메를 향해 날아든다. 몸을 지키려고 손을 들자 마침내 리아스트룸이 명령을 따른다. 안개가 순식간에 방패가 되고, 뾰족한 파편들이 그 표면에 부딪혀 무해하게 튕긴다. 그렇다고 원시 혈족의 야수를 막아 낼 만한 방패는 아니다.
“아직 새끼잖아!” 카엘리스가 외친다. 그게 무슨 차이라도 만든다는 듯이. 사자만큼 큰 몸뚱이의 등줄기를 따라 갈고리 모양 가시가 줄지었고, 팔다리에서도 가시가 솟아 있다. 머나먼 팍소스의 숲에서 타록은 무리 지어 사냥한다. 이곳의 혐오스러운 짐승은 혼자지만, 위험하기는 매한가지다.
감각을 곤두세운 괴물은 이미 무기를 완성한 견습생, 이 방에서 가장 큰 위협을 향해 뛰어든다. 발톱이 뻗어 오자 베이의 눈이 커진다. 허공에서 빛나는 창을 낚아채지만 타록이 더 빠르다. 무기를 제대로 겨누기도 전에 괴물의 육중한 몸이 들이받는다.
베이가 비명을 지른다―
베이가 웃는다
베이가 숨을 들이켠다
베이가 미소 짓는다
베이가 얼굴을 찌푸린다
―사나운 발톱이 어깨를 움켜쥔다. 베이가 뒤로 쓰러지고 괴물이 덮친다. 턱이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정원
도시
하늘
부두
벨라메는 칼을 만들 생각이었다.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은 무기. 하지만 그조차도 벅차다. 특히 베이의 비명이 가슴을 도려내는 지금은. 타록은 그녀를 먹어 치우며 꼬리로 허공을 휘젓는다.
그의 리아스트룸은 여전히 형체 없는 덩어리다. 주문결속체만큼이나 볼품없다.
베이를 실망시킬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방
뼈 무덤
도서관
회랑
“내가 할게!” 왼쪽에서 카엘리스가 외친다. 벨라메는 손을 홱 뗀다. 견습생이 그의 그릇 위로 손을 뻗는다. 다른 손에는 이미 정교한 단검이 쥐어져 있다.
리아스트룸이 즉시 반응한다.
“잡아!” 친구가 소리친다. 안개에서 카엘리스가 든 칼과 똑같은 칼이 만들어진다. 벨라메는 시키는 대로 허공에서 단검을 낚아채고 괴물을 향해 돌아선다. 가시 돋친 등이 두 사람 쪽으로 웅크러져 있고, 뭉툭한 머리는 낮게 처박혀 있다.
베이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창은 연기로 돌아갔다.
더는 웃지 않는다.
더는 숨을 들이켜지 않는다.
더는 미소 짓지 않는다.
더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다.
두 사람은 동시에 내리친다. 카엘리스의 외침에 칼날이 길어진다. 타록의 등 깊숙이 칼이 박히자 흉측한 괴물이 피로 번들거리는 아가리를 치켜들고 고통에 울부짖는다. 그 공격에는 우아함도 기교도 없다. 찌르고 난도질할 뿐이다. 검붉은 동맥혈이 얼굴에 튄다. 괴물은 두 사람을 떨쳐 내려고 몸부림치지만, 견습생들은 가시를 움켜쥔다. 날카로운 돌기가 손바닥을 가른다. 중요한 것은 이 괴물이 죽는 것뿐이다. 최대한 빨리.
베이 위에서 떼어 내야 한다.
그녀를 구해야 한다.
그들을 구해
너 자신을 구해
나를 구해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 끙 하고 내뱉으며 카엘리스가 타록의 머리를 감싸 팔을 뻗는다. 리아스트룸 칼날을 두꺼운 목에 그어 버린다. 괴물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숨 막히는 마지막 포효를 토한다. 벨라메는 분노의 고함과 함께 야수의 눈에 단검을 찔러 넣는다. 죽어 가는 주둥이로 젤 같은 내용물과 피가 쏟아져 흐른다.
괴물이 베이 위에 풀썩 무너진다. 카엘리스가 사체를 뛰어넘자 두 칼이 리아스트룸으로 흩어져 안개처럼 공중에 떠 있다. 두 사람은 함께 괴물의 옆구리에 몸을 던져, 그 저주받을 것을 친구의 몸 위에서 굴려 치운다.
죽은 친구의 몸 위에서.
베이의 눈은 열려 있다. 입은 힘없이 벌어졌다. 목 한쪽이 뜯겨 나갔고, 점점 넓어지는 피 웅덩이 사이로 부서진 뼈가 번뜩인다.
벨라메는 울고 싶다. 세라트린에게 달려들어 그 자식의 목을 손가락으로 조르고 싶다.
이건 그의 잘못이다.
그의 잘못.
그의 살갗 아래 닿은 그녀의 살갗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진 카엘리스의 얼굴
바닥에 무너지는 드렌
마스터는 베이의 시신에는 눈길조차 더 주지 않는다. 앞으로 나서서 그릇과 공기 중에 남은 자신의 리아스트룸을 끌어들인다.
말 한마디 없이 떠난다. 동정도 위로도 없다. 뒤처리를 하러 다시 나타난 바히구진들의 뭉툭한 발이 끌리는 소리만 들린다.
하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다. 벨라메는 더 이상 예전의 견습생이 아니다. 베이의 죽음은 수련에 더 매진하는 데 필요한 충격이었다. 카엘리스는 모든 시련에서 그를 응원했다. 둘은 다시는 그녀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을 구해
나를 구해
너 자신을 구해
펼친 손 아래에서 수반이 소용돌이친다. 리아스트룸은 그의 명령을 기다린다.
분명히, 그는 예전의 견습생이 아니다.
벨라메가 오라클을 올려다본다. 도전의 뜻은 분명하다.
“내가 그대를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라. 내 부름에 복종하라. 내 뜻에 복종하라.”
거대한 구체가 빛난다.
드디어 왔어, 벨. 정원에서 베이가 속삭인다.
네가 애써 온 바로 그 순간이야. 처음 만났던 날의 그녀가 말한다.
나도 함께했어야 하는 순간이지. 주문결속체들이 그녀를 끌고 가는 동안 그녀가 말한다.
벨라메가 이를 드러내며 구체를 향해 손을 든다. “내게 줘. 정당히 내 것인 걸 내놔.”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빛이 구체에서 터져 나온다. 벨라메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켠다. 그토록 훈련했는데도.
연구실에서 고되게 보내던 긴 밤들. 타록 야수가 덮쳐 왔을 때 자신을 저버렸던 힘을 길들이던 시간들. 그 어떤 것도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때는 시냇물에서 놀았다. 지금은 바다를 막아 내려 한다.
가공되지 않은 힘이 그 위로 쏟아진다. 둘레를 휩싼다. 그를 꿰뚫고 흐른다.
피부가 불타고 눈이 멀어 버린다. 잊혔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표면으로 터져 나온다.
고분 모독자와 싸우며 호러 자신의 삽을 병든 심장 깊숙이 찔러 넣는다.
앰블리스 기록고에서 트리아덴 마스터의 위치교환의 두루마리를 훔친다.
카엘리스가 마지막 리아스트룸을 써서 무너진 벽 아래의 아이를 구한다.
처음으로 베이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는다.
리아스트룸은 따를 수밖에 없다. 그의 구체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너만을 위한 게 아니라고?” 옷을 입으며 그녀가 묻는다.
“물론 아니지.” 그가 몸을 굽혀 어깨에 입을 맞추며 말한다. “널 위해서야. 카엘리스를 위해서. 너희가 날 위해 해 준 모든 일을 위해서.”
모독자의 비명.
세라트린의 눈에 어린 탐욕.
아이 부모의 감사.
베이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다른 무언가가 있다. 상상도 할 수 없이 오래된 무언가.
그와 함께 있다. 리아스트룸 속에. 오라클 속에.
목소리.
존재.
“그분이야.” 드렌이 비명을 지른다. “몰레크 본인이야.”
그럴 수 있을까?
“당연하지.” 세라트린이 웃는다.
스피어들 사이에서 속삭이던 이야기들.
몰레크는 단지 오라클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오라클과 하나가 되었다.
나를 보아라.
나를 느껴라.
달아나라.
너 자신을 구해라.
목소리가 그를 태우며 관통한다.
모독자의 마지막 숨결 속에서.
벨라메의 칼날이 가슴을 꿰뚫을 때 트리아덴 마스터가 토한 신음 속에서.
아이의 웃음 속에서.
베이가 그를 밀어낼 때 흘린 눈물 속에서.
감히 내게 명령하느냐? 결코 네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을 훔치려 드느냐?
“내 것입니다!” 벨라메가 맞서 소리친다. “얻어 냈습니다. 수련으로.”
희생으로.
타록이 살과 뼈를 물어뜯는다.
베이가 실수였다고 말한다.
“당신은 내게 복종할 겁니다. 내가 지배하겠습니다.”
그럴 자격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 닥치든 그것을 바라느냐?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네 것이 되리라.
다시 뒤바뀐다. 또 다른 장소다.
이제 그는 마스터다. 탐색자다. 강인하고, 구체는 가득 차 있으며 시선은 맑다. 혼란도 방해도 없다. 그들은 말레딕션에 왔다. 손에는 세라트린의 팔갑을 끼고 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카엘리스가 함께 있다. 당연히. 나이가 들었다. 마스터가 된 뒤 다뤄 온 리아스트룸의 흔적인 얼굴의 흉터를 가리려, 더욱 짙푸른 화장을 했다.
하지만 장벽 너머 깊숙이 묻힌 이 도시는 지금껏 본 어느 곳과도 다르다. 건물들은 뒤틀리고 탑들은 녹아내린 밀랍 같다.
녹아내린 살점 같다.
이것은 기억이 아니다. 미래다.
해냈다. 두 사람 모두. 시선을 이겨 내고 살아남았다.
“벨…….”
카엘리스의 목소리가 이상하다.
“벨…… 도와줘.”
그는 돌아서서 친구를 본다.
“구해…… 줘…….”
카엘리스의 피부가 부글거리며 일그러지고, 살갗 아래 혈관이 검게 변한다. 눈에 피가 차오른다. 다시 말하려 하지만 입안에는 송곳니가 너무 가득하다.
한때 살아남으려고 소매치기를 하던 소년이었던 남자가 앞으로 달려든다. 영혼을 오염시킨 정체 모를 공포에 삼켜진 채.
손에서 발톱이 솟아 벨라메의 목을 향해 뻗어 온다.
나를 구해.
너 자신을 구해.
벨라메의 구체에서 리아스트룸이 튀어나와 즉시 도끼를 이룬다. 날은 예리하고 반듯하다. 그의 손이 자루를 잡고 망설임 없이 내려친다.
카엘리스의 머리가 땅에 떨어져 구르다 벨라메의 발치에서 멈춘다. 핏빛 눈이 그를 올려다본다.
안 돼.
안 돼!
오라클은 고요하다. 공기는 맑다. 발밑의 수반에서 리아스트룸이 소용돌이친다.
그는 마스터가 되었고 카엘리스는 죽을 것이다.
한순간, 두 가지 진실.
네 손에 죽을 것이다.
벨라메는 두 계단씩 뛰어 내려가며 마스터들의 관람석은 올려다보지도 않는다. 방 뒤쪽으로 달려가며 손을 치켜들자 대기실 문이 활짝 열린다.
카엘리스가 돌아서서 다가오는 친구를 본다. 가득 차서 빛나는 벨라메의 구체를 향해 눈길이 재빨리 내려간다.
“해냈구나!” 그가 활짝 웃으며 외친다. “네가 해낼 줄…….”
“나가!” 문턱에 도달한 벨라메가 고함친다. “여기서 벗어나.”
카엘리스의 미소가 사라진다. “무슨 소리야?”
“시험을 받으면 안 돼. 마스터가 되어서는 안 돼.”
“뭐?” 카엘리스의 손이 옆구리에서 얌전히 기다리던 자신의 구체로 향한다.
“왜?”
“죽을 거니까, 카엘리스. 넌…… 넌 죽을 거야.”
견습생의 얼굴이 굳는다. “그러십니까…… 마스터님.”
벨라메가 그의 팔을 잡으려 한다. “넌 이해 못 해.”
카엘리스가 뿌리친다. “너는 이해하고?”
“그래.” 친구가 귀를 기울여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벨라메가 애원한다. “저 방에 들어가면…….”
“난 실패할 거라고. 그 말이야? 해내지 못할 거라고?”
“아니…… 아니, 맞아. 넌 시험을 받으면 안 돼.”
카엘리스가 고개를 저으며 돌아선다. “기가 막히네.”
“카엘리스…….”
“내가 이걸 갖는 꼴은 못 보겠다는 거구나. 지금까지 함께 겪어 온 일이 있는데도.” 견습생이 얼굴을 붉히며 다시 휙 돌아선다. “내가 널 위해 한 일이 있는데도. 그 오랜 시간 널 붙들어 주고,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왔는데도.”
그가 한 걸음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춘다.
“나 아니었으면 넌 여기에 있지도 못했어.”
벨라메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본다. 상처가 보인다. 배신감이 보인다.
“날 믿어, 칼. 잘못될 거야.”
카엘리스는 눈길을 피하며 먼 곳을 보았다가 다시 돌아본다. “네가 날 그렇게 부를 자격은 없어. 넌 그녀가 아니잖아.”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가 버린다. 벨라메를 거칠게 밀치고 지나가며 어깨가 부딪친다.
다시는 이러면 안 돼, 벨. 실수였어. 내가 사랑하는 건 칼이야. 네가 아니라.
문이 쾅 닫힌다.
“빌어먹을.” 벨라메가 내뱉는다. 카엘리스의 시련이 끝날 때까지는 셀레지아의 어떤 힘으로도 저 문을 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대기실을 나와 회랑을 질주한다. 지나치는 견습생들이 놀라서 쳐다보지만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귀한 리아스트룸을 써서 탑 위로 솟구치자, 마스터들의 관람석으로 이어지는 대리석 계단이 발아래 흐릿하게 스쳐 간다. 전에는 꿈꿀 수밖에 없던 재주가 이제는 타고난 능력처럼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다가서자 관람석 문이 열릴 때도 승리감은 없다.
그가 다가가자 동료 마스터 몇 명이 쳐다본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래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눈을 떼지 못한다. 세라트린도 그들 가운데 있다. 벨라메가 곁에 내려서도 축하 한마디 하지 않는다.
“뽐낼 필요는 없단다, 얘야. 나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아래에서는 카엘리스가 오라클을 향해 성큼성큼 걷고 있다.
“막아야 합니다.” 벨라메가 다급히 말한다.
“저 아이는 몰레크를 바라볼 권리를 얻었다.”
“하지만…….”
갓 마스터가 되었든 말든, 세라트린은 여전히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 그를 침묵시킬 수 있다.
“시작한다.”
카엘리스는 높은 단 위에 서서 구체들을 향해 고함친다. 발밑 수반의 리아스트룸이 격렬하게 요동친다.
“이상하군.” 세라트린이 말한다. “카엘리스는 늘 침착하고 정확한 아이인데. 시시한 농담을 하려 들 때만 빼면.”
마침내 그가 벨라메를 돌아본다.
“저토록 격분할 만한 일이라도 있었느냐?”
벨라메는 대답할 수 없다. 전보다도 거센 리아스트룸의 해일이 오라클에서 터져 나오자 관람석 가장자리를 두 손으로 움켜쥔다.
견습생을 감싸 흐르며 카엘리스의 뜻에 따라 춤춰야 한다. 그러나 리아스트룸은 그를 꿰뚫고 지나간다. 로브에 푸른 불꽃이 솟는다.
너였어. 베이가 속삭인다. 네가 이런 일을 벌였어.
그들은 세라트린의 방에 서서 드물게 주어지는 스승의 가르침에 귀 기울인다.
“시선을 마주할 때는 침착해야 한다. 몰레크는 너희를 시험할 것이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면 너희를 산산이 찢어 놓을 수도 있지. 하지만 결코 분노로 응답해서는 안 된다. 자신과 자신이 바라는 것에 집중하면 보상을 받을 것이다. 분노하면 압도당하리라.”
세라트린의 말에는 친절이 없었다. 거래였을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승격된 뒤에도 수년 동안 스승에게 진 빚은 남는다. 세라트린이 죽으면 스피어가 그 빚을 넘겨받는다.
그것이 그들이 택한 삶의 방식이었다.
“막으려고 했어.” 벨라메가 중얼거린다. 아무도 들을 수 없다. 베이 말고는.
그를 구하려 했지.
그래.
그가 너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구했던 것처럼.
카엘리스의 구체가 허리띠에서 떨어져 계단을 덜커덩 굴러 내려간다. 두 팔은 활짝 벌어져 있다. 대기실에서 친구를 웃기려고 취했던 자세를 흉측하게 흉내 내는 듯하다.
넌 할 수 있어, 벨. 내가 장담할게.
안개가 피부를 찢고 지나가며 남아 있던 로브를 갈가리 찢고, 살 깊숙이 파고든다. 청동빛 피부가 새까맣게 타고 잘생긴 이목구비가 녹아내린다. 반짝이던 그 눈. 아낌없이 지어 주던 그 웃음. 게이트웨이 거리에서 단련한 날렵한 손가락들은 비틀리고 납작해지며 형체를 잃어, 허우적거리는 촉수가 된다. 몸이 부풀고 뼈가 부러졌다가 다시 만들어져, 뒤엉키고 뒤틀린 몰골이 된다. 오라클의 눈부신 빛이 가라앉았을 때, 아래의 방에는 카엘리스의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 어리둥절한 고통 속에서 쌕쌕거리고 딸깍거리며 비틀거리는 혐오스러운 것 하나뿐이다.
“미안해.” 벨라메가 숨처럼 내쉰다.
“뭐라고 했느냐?” 세라트린이 그를 올려다본다.
벨라메는 입을 열 자신이 없어 고개만 젓는다.
세라트린이 이해한다는 듯 끄덕인다. “네 마음 안다. 실망스럽지. 그 많은 리아스트룸이 낭비되었으니. 내가 알아봤어야 했는데.”
“경고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봐. 베이가 속삭이며 희미해져 간다.
세라트린의 손이 벨라메의 팔을 탁 친다. “그래도 네게는 재능이 있다는 걸 늘 알고 있었단다. 나의 으뜸가는 제자.”
피부에 소름이 돋지만 말은 저절로 나온다.
“감사합니다, 마스터님. 제가 마스터님께 빚진 것이…….”
“전부지.” 벨라메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세라트린이 끊는다. “그래. 그래, 전부다. 죽는 날까지 내 친절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그 고약한 자식이 먼저 죽지 않는 한. 항구의 왜소한 소년이 말한다.
벨라메는 비명을 지르고 싶다. 고함을 치고 싶다. 리아스트룸 단검을 세라트린의 눈에 쑤셔 넣고 싶다.
대신 미소 짓는다.
세라트린도 웃음을 돌려준다. 유쾌한 표정은 아니다.
“우리는 큰일을 해낼 것이다. 너와 나는.” 세라트린이 말하며 그를 관람석 가장자리에서 데리고 떠난다.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마스터님.” 벨라메가 대답한다. 바히구진 한 쌍이 방으로 비틀비틀 들어와 새로 생긴 동족을 데리고 가는 아래쪽을 내려다보지 않으며.